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궁금한 민속

책 골라주는 남자


선비의 나라이자 책의 나라였던 조선.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책을 간행했으며, 다른 나라보다 앞서서 금속활자가 실용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끝까지 서점만큼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선보다 인쇄술이 뒤떨어졌던 일본과 중국에 비교적 일찍 서점이 등장한 것과 대조적이다. 대신 서점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서쾌書儈’라고 불리는 서적 중개상이다.

 

원하는 책이 있소?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

 

‘책쾌冊儈’나 ‘아쾌牙儈’라고도 불리던 이들은 양반가를 드나들면서 책을 사고파는 일을 했다. 누군가에게 주문을 받으면 그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 가격을 흥정한 다음, 적당한 중개료를 받고 구매자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사실 서쾌의 존재는 서점을 불필요하게 했다. 당시에 책이 보고 싶은 책을 골라볼 만큼 많이 간행되지도 않았고, 웬만한 정보는 서쾌의 머릿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학자인 유만주의 기록을 보면 당사자와 서쾌와의 대화내용이 들어있다. 서쾌는 유만주가 구하고자 하는 책이 어디에 사는 누구의 소유이며, 어떤 활자를 써서 찍었는지, 그리고 가격이 얼마인지를 술술 대답해준다. 그것은 서쾌의 머릿속에 책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서쾌들은 언제부터 활동했을까? 조선 중기 학자인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보면 16세기 중반에 이미 양반집을 돌면서 책을 판매하거나 구매하는 일을 했던 서쾌 송희정과 박의석의 이름이 보인다.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으로 공부 해야만 했기 때문에 선비와 서쾌의 존재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서쾌를 단순히 서적 중개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선비들이 남긴 서쾌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책의 구입에 대해 상의하거나 추천을 부탁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서점이라는 전시공간만 없을 뿐이지 오늘 날 북 큐레이터나 서점의 MD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이다.

 

서쾌에 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조선 후기다. 인쇄술이 민간에까지 널리 퍼졌고, 책을 읽는 독자층도 늘어났다. 예전에는 과거를 보기 위해서 책을 봤다면 이 시기에는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독서가 생겨났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화폐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지위는 낮지만 돈은 많은 계층이 생겨났다. 주로 무역을 통해 돈을 모은 역관들과 장사를 통해 돈을 번 상인들이었다. 아울러 여항문인이라고 불리는 존재들도 생겨났는데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문학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고, 바야흐로 서쾌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기가 가능합니다.
책가도 8폭 병풍冊架圖八幅屛風

조선 시대에는 책을 손에 쉽게 넣을 수도, 원하는 만큼 모두 가질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서쾌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림은 <책가도 8폭 병풍冊架圖八幅屛風>. 서책, 자기, 문방사우 등과 매화, 난, 석류, 가지, 수박 등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로 138.5cm * 가로 365.4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신선’이라 불린 서쾌가 있었으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서쾌를 꼽자면 당연히 ‘조생’, 혹은 ‘조신선曺神仙’을 들 수 있다. 집안 내력이나 가족관계 같은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인물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서쾌 노릇을 했는데 몇 십 년을 늘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책을 사고 팔아 돈을 벌면, 곧장 주막집으로 달려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누군가 왜 고생스럽게 번 돈을 흥청망청 쓰는지 묻자 조신선은 태연스럽게 책을 사고파는 걸 통해 한 집안의 흥망성쇠를 볼 수 있고,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대꾸했다. 책에 대한 광적인 집념과 해탈의 경지에 이른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신선 외에도 적지 않은 서쾌들이 거리를 누비면서 책을 사고 팔기 위해 흥정을 하는 모습은 낯익은 풍경이었다. 그런 서쾌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일이 있었으니, 바로 ‘명기집략 사건’이다.

 

<명기집략明紀輯略>은 청나라 학자인 진건이 쓴 <황명통기皇明通紀>를 바탕으로 주린이 쓴 역사서인데 광해군을 어진 임금으로 칭송하고, 인조를 폭군으로 묘사하는 등, 문제가 될 만한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문제는 이 책이 청나라를 드나드는 사신과 역관들을 통해 조선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안 영조는 단속령을 내리고, 소지한 선비들을 체포했다. <명기집략>의 유통에 관여한 서쾌들도 날벼락을 맞았다. 이때 체포되어서 처형된 서쾌들이 백 명에 달한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사건인지 짐작이 간다. 주목할 만한 건 조신선이 ‘명기집략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종적을 감췄다가 세간이 잠잠해졌을 무렵 태연하게 다시 나타나 거리를 활보하며 예전처럼 책을 사고팔았다는 점이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기가 가능합니다.
책거리도

<책거리도 6곡 병풍>. 일반적인 책거리도에는 다양한 사물과 책이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 책거리도에는 서적만 담겨있다.
세로 213.5 * 가로 55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뭐든 먹고 사는 건 녹록지 않은 법,
하지만 책이 있으니 괜찮은 세상 아니오?

 

물론 서쾌 노릇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고객과 책에 관한 모든 자료들은 머리에 집어넣어야 했다. 당연히 글을 읽을 줄 알고, 내력을 꿰뚫어야 하는 지식도 있어야 했으며, 주요 고객층인 양반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의 품위도 지녀야만 했다. 하지만 단골손님만 확보하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발품 정도만 파는 것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서쾌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책과 서점이 풍요로운 시대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거리를 누비던 서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서점에 가서 진열된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쁘게 뛰어가는 서쾌들이 모습이 겹치곤 한다. 인간이 책을 사랑하는 동안, 서쾌들에 대한 기억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글_ 정명섭
저자 정명섭은 파주 출판도시의 카페 바리스타로, 9년 동안 커피를 내리면서 책과 글에 매료되어 장르문학과 역사 분야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서로는 《조선직업실록》, 《혁명의 여신들》, 《암살로 읽는 한국사》, 《조선전쟁생중계》, 《역사 공화국》, 《폐쇄구역 서울》 《마의》 등의 소설을 집필했으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기획안 선정작으로 《조선백성실록》을 출간했다. 2013년 제1회 직지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더 알아보기
9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양석줏 댓글:

    재미있고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책쾌, 처음 듣는 새소한 직업ᆢ
    소개글이 참 유익했습니다.
    조금 더 길었으면 하고 아쉬울 정도 였습니다.
    수고 하세요.

  2. 조미랑 댓글:

    전혀 몰랐던 서쾌의 존재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3. 최영희 댓글:

    서쾌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 역사에 이토록 매력적인 직업인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정명섭 작가님, 흥미롭고 명쾌한 글 고맙습니다.

  4. 박현선 댓글:

    제목에서 흥미를 느껴 읽었는데..
    정말 새롭고 재미있는 직업이네요..
    더 자세한 내용이었으면,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책도 추천해 주셨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5. 이기태 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플라이북’이라는 책 골라주는 서비스가 생각나네요

  6. 김주미 댓글:

    정말 다양한 직업이 존재했구나!또 한번 조선의 매력에 빠져봅니다.감사합니다.

  7. 김주미 댓글:

    정말 다양한 직업이 존재했구나!또 한번 조선의 매력에 빠져봅니다.
    명기집략의 내용이 궁금해지기도하구요~~
    감사합니다.

  8. 김하영 댓글:

    흥미진진하게 읽엇습니다…보면서..서쾌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9. 박정아 댓글:

    국립민속박물관 웹진의 흥미로운 구성을 또 한 번 만나는군요.
    세계 역사상 500여년에 걸친 한 왕조의 장구한 기록(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는 우리의 조선시대는 놀라운 역사라 여겨집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걸어다니는 서점 역할을 해 주던 그 시대 독특한 직업인 서쾌에 대한 소개글이 참 반갑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란 문구와 연관되어 ‘책 골라주는 남자’란 제목 문구가 확 시선을 끌어당기네요.
    갠적으로 서쾌에 관한 소재는 만화 ‘밤을 걷는 선비'(글 조주희, 그림 한승희)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었지요.
    최근 TV방송국에서도 동명 작품으로 드라마화 방영되었었구요.

    반갑고, 이색적이고 독특한 역사 속 직업이다보니 소개글 마무리 즈음엔, 저 또한 더 상세한 글(가령, 글 속에서도 언급된 선비들과
    서쾌의 대화 등도 구체적으로 소개되거나, 잘 알려진 선비 중 누군가는 이런저런 책들을 주문했다거나 서쾌를 통해 중개받았다라거나
    같은 살짝 가십정보성 얘깃거리 또한 재미를 불러일으킬 것 같거든요.)을 기대하고 있었답니다.

    향후에도 심화코너 기회를 모색해 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소개 코너에 힘써 주시는 여러 분들, 감사합니다~

Leave a Reply to 김주미 Cancel reply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