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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의 흥망성쇠

나는 유하의 시를 읽다가 ‘세운상가’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시를 읽기 전까지 내게 ‘세운상가’는 없는 곳이었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이라는 시다. 1995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이라는 동명의 시집에 실려 있다. 시집이 나온 지 일이 년이 지나서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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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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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26일 세운상가 개관 당시의 모습.
사진 출처 서울시청 정보공개정책과(정보소통광장)

 

‘목이 쉰 야외 전축’ 덕일까? 탈색된 필름으로 보는 영화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다시 읽어도 그렇다. 망실된 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더–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고유명사들이 출몰하는 세계. 그래서 나는 유하의 이 시집을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알았다. 세운상가는 중고품을 파는 곳이라는 것을. 그리고 포르노. 그리고 해적판을 파는 곳이라는 것도. 아마도 이 시를 읽다가 해적판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해적판의 ‘해적’은 내가 아는 그 해적海賊이었다. 정당한 권리 없이 물건을 갈취하는 사람인 해적처럼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고 세상에 나온 물건인 해적판.영어로도 해적판은 해적판이다. Pirated Edition으로 쓴다. 지금으로 따지면, 불법 다운로드한 파일쯤 될 것이다. 인터넷이 없었던 그때는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끼리 만나서 돈과 물건을 교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운상가는 오프라인으로 된 P2P사이트였던 셈이다.

 

이 시를 쓴 유하가 1963년생이고, 시인의 청소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이니, 아마도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 나오는 세운상가는 1980년 전후의 세운상가일 것이다. 이미 세운상가가 활기를 잃고 나서다. 세운상가의 전성기는 1970년대 중반까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운상가는 신식이고, 화려한 데다, 첨단의 건물이었다. 무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이었다.

 

세운상가는 35세의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1966년 9월 착공에 들어가 2년 뒤인 1968년에 완공된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염원을 담아 세운상가라는 이름을 짓는다. 세운상가는 8층부터 17층짜리 건물 8개로 이뤄진 다목적 건물이었다. 상가동에는 전자 산업 관련 상점들이 입점했고, 주거동에는 연예인과 고위 공직자, 대학교수 등이 입주했다. 김현옥의 바람대로 세운상가는 1970년대 중반까지 ‘운’을 떨친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강남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주거지로서의 매력을 잃고 서서히 퇴락하기 시작한다. 유하는 이때의 세운상가를 드나들던 ‘세운상가 키드’로서의 자신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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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운상가 키드, 종로3가와 청계천의
아황산 가스가 팔 할의 나를 키웠다
청계천 구루마의 거리, 마도의 향불 아래
마성기와 견질녀, 꿀단지, 여신봉, 면도사 미스 리
아메리칸 타부, 애니멀, 뱀장어쑈, 포주, 레지, 차력사…
고담市 뒷골목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
나의 뇌수는 온통 세상이 버린 쓰레기의 즙,
몽상의 청계천으로 출렁대고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3> 중에서

 

아황산가스, 고담市 뒷골목, 쓰레기의 즙… 그는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의 세운상가를 이런 단어들로 묘사한다. 이것들이 직접적으로 세운상가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출렁이며’ 세운상가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세운상가는 버림받은 것들중고 제품, 금지된 것들포르노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첨단 문명의 형상을 갖추었으되, 문명의 이름으로 “등록 거부”된 존재들, “고담市의 뒷골목에 뒹구는 쓰레기들의”‘고담’은 ‘고준담론’의 준말이고, 풍자적으로 쓰인 것이리라 집합지이다.”

 

‘고담’이 ‘고준담론’의 줄임말이라니.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어떤 청정한 도시라도 뒷골목에는 구정물이 고이기 마련이니까. 나는 당연히 ‘고담市’를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인 고담 시라고 알아들었다. 팀 버튼이 감독한 <배트맨>은 1989년 제작되었고, 1990년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고담 시인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딴 이름이라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나는 고담 시에 산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때의 철 지난 농담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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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당시의 세운상가. 한때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세운상가는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뉴시스

 

새로운 것은 빨리 낡는다. 더 새로운 것이 나오면 새로웠던 것은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 같은 센 이름을 쓴다고 해도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쓰다가 현재의 세운상가에 대해 검색해봤다. 초록띠 공원이라는 게 만들어진 것 같고, 여러 아이디어들이 있었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것 같다. 최근 서울시는 세운상가 일대에 공중보행교를 설치해서 상업ㆍ관광중심지로 재탄생시킨다고 발표했다. 아마도 뉴욕의 하이라인 프로젝트가 롤모델인 것 같다. 2017년 5월 완공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1월 13일부터 27일까지 세운상가에서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전시가 열렸던 것을 알았다. 전시 제목은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세운상가를 다시 만나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처음 만나는 세운상가’가 될 것이다.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와 ‘처음 만나는 세운상가’가 교차할 것이다. 과거는 여전히 현재로 되돌아오고 있다.

 

유하

시인이자 영화감독. 1963년 전북 고창 출생.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1990년에 단편영화 <시인 구보 씨의 하루>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무림일기》를 시작으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세상의 모든 저녁》 등의 시집과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등을 출간했고,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을 만들었다. 김수영문학상, 백상예술대상 영화 시나리오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글_ 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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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박정아 댓글:

    전 세운상가에 대한 추억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만 글을 읽으며
    우리 현대사의 한 면을 차지한 건축물이었구나라고 인식하게 되네요.

    세운상가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담은 유하 작가님이나 개관 당시의
    세운상가 건물을 찍은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시청, 세운상가의
    작명 유래, 최근의 세운상가 일대의 문화관광차원의 새로운 도전 등
    역사와 우리의 삶, 현재, 미래가 서로 엮인 곳으로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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