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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 화잠소창

진세현의 문집 『화잠소창華岑消唱』과 한시 「태양십이경太陽十二景」

2005년 3월 2일,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의결은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해당 지역의 주민에게는 청천벽력같은 결정이었고, 토지수용과 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원주민들은 “산 사람은 물론 죽은 자도1)” 고향을 떠나야 했다. 물론, 개발로 한몫을 챙겨보자는 사람들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때 누군가는 집안에 보존해오고 있는 상자에 눈길을 돌렸다. 집과 고향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가보家寶도 잃어버리고, 영원히 뿌리를 잃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도시개발로 사라질 마을의 민속을 기록해서 남기기 위해 민속조사를 추진하였다. 조사는 전체 50개 행정리 지표조사, 도시로 개발되는 지역인 33개 행정리 심층조사, 반곡리현 세종시 반곡동 조사 등 크게 3가지로 구분되었다. 특히 민속지, 민가, 생활재살림살이, 영상 민속지 등으로 구성된 반곡리 조사가 가장 세밀하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6년 2월 반곡리 마을의 여양 진씨 후손 진병갑, 진병덕, 진병돈 형제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선조가 남긴 서적 등 135건 450여 점2)을 기증하였다. 이 중에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반곡리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794년에 작성된 『반곡식목서盤谷植木序』는 반곡리 수구水口의 식목植木에 관한 논설을 담고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다. 그리고, 위정 진시책陳時策, 1831~1906의 문집 『위정집葳汀集』이 있다. 진시책은 구한말 문신 서상우徐相雨, 1831~1903에 의해 고종황제에게 천거되었을 정도로 지역과 중앙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위정집』은 지역 사람들과의 간찰을 통한 교류, 문중 주요 사역事役의 현황, 지역의 중요 장소와 일에 관한 기록 등 구한말 반곡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의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또 다른 자료로 진세현陳世顯, 1854~1928이 남긴 문집 『화잠소창華岑消唱』이 있다. 진세현은 위정 진시책의 장남으로 태어나 평생을 반곡리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시부詩賦에 능하여 초시初試 복시覆試에 합격하였으며,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다. 부모에게 효행이 지극하여 1925년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을 받았다.3) 부친과 마찬가지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진세현은 고향에 대한 애정을 시문으로 남겼다. 화잠華岑은 진세현의 호로서, 반곡리를 품고 있는 괴화산槐華山에서 왔다. 『화잠소창』에는 무격론巫覡論, 이앙移秧, 보리타작, 혼인, 복날, 닭싸움, 붓, 목침木枕, 부채, 망건網巾, 제비, 거미, 포도, 오동, 앵두 등 풍속과 일상생활의 풍경, 생활 물품, 자연물을 소재로 한 시와 산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칠언율시七言律詩 13수로 구성된 「태양십이경太陽十二景」은 반곡리를 중심으로 부강에서 나성리까지 세종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금강의 주변 경관을 묘사하고 있다.

 

‘태양太陽’은 이 마을 진씨 문중의 두 문헌에 등장한다. 하나는 「태양 진씨 대종계서太陽陳氏大宗契序」1909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진세현의 「태양십이경」이다. ‘태양’은 당나라 문학가 한유韓愈가 친구 이원이 반곡盤谷으로 돌아가 은둔하는 것을 칭송하며 쓴 ‘송이원귀반곡서送李願歸盤谷書’에 나온다. 한유의 글은 “태항산의 남쪽에 반곡이 있다太行之陽有盤谷”는 말로 시작되는데, 반곡을 의미하는 ‘태양’이 여기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이 관료 사회의 추잡한 현실을 피해 은둔지로 삼은 ‘반곡’과, 여양 진씨 집의공파 일파가 사화士禍를 피해 정착한 ‘반곡’은 같은 이름으로, 고상한 뜻을 품고 은거하는 특별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태양십이경太陽十二景」 시문은 많은 전고를 인용하여 문학적 색채가 농후할 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담고 있어 금강 중상류 지역 농경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의 나루를 묘사한 시와 현지에 전해지고 있는 전설4)을 담고 있는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鶯津歸帆(앵진귀범) 앵챙이나루로 돌아오는 배
順風如箭往來時 순풍 타고 쏜살같이 오고갈 때
鶯歇烏啼遠客悲 꾀꼬리 노래 그치고 까마귀 우니 멀리서 온 나그네 서글퍼지네
島頭灘項爭流處 섬 어귀 여울목 강류가 다투어 흐르는 곳
賈子漁兒大會期 상인과 어부가 크게 모여드는 시기라네
路回剡水秋霜早 섬계5)로 가는 길에는 가을 서리 벌써 내렸고
地轉楚江暮雨遲 초강楚江6)으로 돌아드는 땅에는 저녁 비 가늘게 내리네
就中誰效袁宏癖 이 속에서 누가 원굉袁宏7)의 취미를 따라하고 있는가?
載來月汀好咏詩 실어 온 달빛 비치는 물가는 시 읊기에 좋다네


月峰奇岩(월봉기암) 전월산의 기이한 바위
峯回月轉作名園 월봉 돌아드는 곳에 명원名園을 만들었으니
岩勢最奇化女魂 바위 기세 기이하여 여인의 넋으로 변한 곳이라네
幸免秦鞭藏磊磊 다행히 진시황의 채찍을 면하여 우뚝한 바위 간직되었고
遠超崑火立軒軒 곤륜산의 뜨거운 화재 멀리 벗어나 높다란 바위 서있다네
上含碧落千秋色 위로는 푸른 하늘 천추의 빛을 머금었고
下壓長江萬里源 아래로는 장강長江 만 리의 근원을 누르고 있네
一片寒山堪共語 한 자락 적막한 산이지만 함께 대화할 만하니
時時出望倚橋門 때때로 나가 교문橋門에 기대어 바라본다네

잃어버린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문중 대표들로 구성된 ‘반곡역사문화보존회’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 한시들은 비로 새겨져 마을 앞 금강 변현 반곡동 수루배마을 3단지 앞에 세워졌다. 2021년 11월 6일, 태양십이경 시비詩碑에 옛 반곡리 주민 몇 명이 모였다. 그간 반곡리 역사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반곡역사문화보존회 회원, 태양십이경을 지은 진세현의 증손 진병돈8), 그리고 반곡리 민속조사를 했던 필자 등이다. 오랜만에 만난 주민들은 이 망향望鄕의 시비 앞에서 ‘고향’의 의미를 새삼 절감하면서 자연스레 마을의 역사와 전승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잃어버림’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잊힘’이다. 이 시비는 사라진 고향을 그리워하는 반곡리 주민들에게 또 하나의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화잠소창』은 지역의 과거 일상 및 선비의 정신세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도시개발과 이주 과정에서의 기증 결정, 그리고 이후 기증자와 국립민속박물관의 지속적 관계 맺기, 문중 대표로 이루어진 주민 연합체의 결성과 마을 흔적 남기기를 위한 노력 등이 두루 담겨 있는 소중한 자료다.

1) 조상의 무덤까지 이장(移葬)해야 했음을 말한다.
2) 이후 추가 기증하여 총 917건 927점에 달한다.
3) 1926년 연기군에서 편찬한 『공부자성적도속수오륜행실(孔夫子聖迹圖續修五倫行實)』에 기록되어 있다. 이 포창완의문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전월산의 ‘며느리바위’에 관한 전설이다.
5) ‘섬수(剡水)’는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친구 대규(戴逵)를 만나러 배를 타고 찾아갔던 섬계(剡溪)를 말한다.
6) ‘초강(楚江)’은 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쫓겨나 서성이며 울분을 삭였던 곳이다.
7) ‘원굉(袁宏)’은 동진(東晋)의 문인(文人)으로, 그가 우저기(牛渚磯)에서 뱃사공 일을 하면서 시를 읊었던 것을 말한다. (『晉書』·「袁宏傳」)
8) 진병돈은 증조부의 시가 시비로 건립된 것을 아주 소중히 생각하여, 거의 매일 시비에 와서 잡초를 뽑거나 휴지를 줍고 있다.


글 | 김호걸_민속기획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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