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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쪽 문화사 | 커피

우리나라 커피의 변천사

커피는 시대를 반영한다. 구전을 제외하고 명확한 기록만으로 따져 1,100년이 된 커피의 음용 역사를 반추하면, 굵직한 세기적 사건에는 어김없이 커피가 등장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중해 장악, 청교도 혁명, 비엔나 전투, 미국의 탄생,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노예 무역과 해방, 산업 혁명과 삼각무역 등을 커피가 관통하고 있다. 커피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소통하게 하고 정보와 지혜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각성이 이루어지고, 시대를 바꾸는 혁명의 힘으로 이어졌다. “커피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한 국가를 들여다볼 때도 커피는 역사를 푸는 열쇠이자 당대의 문화 코드다. 우리 역사에서 커피는 어떤 의미였을까? 기록과 물증에 따라 현재로서는 160년 역사를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한국 커피의 변천사를 짚어봤다.

우리나라 커피의 시작
우리 땅에서 ‘커피’가 적힌 최초의 기록은 철종재위 1849~1864 때 나왔다. 조선 천주교회 4대 교구장이던 베르뇌Berneux 신부가 1860년 3월 6일에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낸 편지에 ‘커피’가 적혀 있다. 이 기록은 고종이 아관파천 때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는 1896년 2월보다 36년이 앞서는 것이다. 베르뇌 신부가 리브와Libois 신부 앞으로 보낸 이 편지에는 “커피 20kg생두로 추정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커피는 이듬해 바다를 통해 조선으로 입국한 랑드르Landre 신부를 통해 잘 받았다는 내용도 베르뇌 신부의 다른 편지에 나온다. 베르뇌 신부는 1861년 9월에도 커피 25kg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썼고, 1863년 11월에는 요구량이 50kg로 늘어났다. 혼자 마시기에는 많은 양이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도 나눠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브와 신부는 1937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마카오에 있을 때, 신부가 되기 위해 조선에서 건너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가르친 스승이다. 마카오는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어 신학교에는 서양음식과 커피, 와인이 제공됐다. 리브와 신부가 쓴 기록물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하다가 잘 적응했다는 내용이 발견돼 커피를 접한 최초의 한국인은 김대건 신부와 최씨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궁중에서 향유하기 시작한 커피
1846년 병오박해가 마무리된 때로부터1866년고종 3년 대원군에 의해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탄압 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나기까지 약 20년 동안은 천주교 선교가 비교적 활발했다.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신도수가 2만여 명에 달했으며, 왕실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고종의 생모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로서 1863년 아들이 임금이 되자 운현궁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으며, 고종의 유모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이런 정황에 비쳐 베르뇌 신부의 커피가 천주교 전도와 함께 조선 왕실에 전해졌을 수 있다고 이완범 박사는 논문 『커피의 한국 유입과 한국인의 향유 시작』에서 밝혔다. 커피가 전래된 과정을 보면 대부분 왕족, 귀족,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가 형성된 뒤 대중에 퍼졌거나 예수회 선교 도구로 활용돼 일반에 직접 스며들기도 했다. 베르뇌 신부의 편지 다음으로 ‘커피’는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 8월 수출입일람표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조선의 커피 수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데, 개항이 이보다 빨랐다면 기록도 앞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관파천보다 13년을 앞서 조선 정부가 수입을 허용할 정도로 커피의 내수 시장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정부도 경복궁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에게 커피를 냈다.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기록된 호러스 알렌은 경복궁에서 커피가 제공됐다고 기록했다. 그는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어의가 돼 정2품 벼슬도 받았는데, 미국으로 돌아가 쓴 ‘조선견문기’에 1884년 궁중에서 대기하는 동안 커피 대접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 이 시기 항간에 커피가 널리 퍼졌음을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증언했다. 그는 저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1884년 1월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언덕에 있는 ‘더 하우스 오브 슬리핑 웨이브the house of sleeping waves’라는 별장에 가서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고 적었다.

커피 대중에게 전해지다
조선 말기 시작된 커피의 대중화는 독립신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897년 3월 20일에 “정동의 ‘골스찰키Gorschalki’에서 자바 커피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게재됐다. 골스찰키는 1884년 입국해 제물포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독일 상인이다. 1899년 서울전차가 개통된 후에는 이른바 ‘역세권’에 일반인을 상대로 한 커피판매점이 등장했다. 8월 31일에 실린 광고에 “윤용주가 홍릉 전차정거장 앞에서 다과점을 개업하고 커피와 차, 코코아를 판매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시설과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윤용주의 다과점은 현재까지 기록으로만 보면 한국인이 주인인 최초의 대중 커피 판매점이다. 1899년은 제물포와 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서구형 도시 문화가 인천에서 한양으로 빠르게 옮겨지기 시작한 해로 기록된다. 정동 공사관 거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풍 호텔이 속속 들어서며 근대 도시형 번화가가 형성됐다. 이즈음 한양에 거주한 서양인이 3,000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 청일전쟁, 삼국간섭, 러일전쟁,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사건들 속에서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해 치밀한 외교전을 펼치는 데 커피는 중요한 도구가 됐다. 고종은 순종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던 베베르 주한러시아공사의 처형인 미스 손탁에게 1902년 호텔을 지어주고 사실상 영빈관으로 활용했다. ‘손탁호텔’로 불린 이 건물은 2층에는 귀빈실, 1층에는 일반 객실과 레스토랑이 꾸며졌다. 레스토랑에 친미-반일 성향의 외교관들과 국내 지식인들이 몰려들어 커피를 마시며 일본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과 함께 일본군과 순사 간부들의 소굴로 바뀌었고, 레스토랑은 ‘정동구락부’로 불리며 조선 침탈의 거점으로 악용됐다. 이어 일제강점과 무단통치가 강행된 암흑시기에는 커피와 관련한 기록뿐 아니라 구전조차 흔적이 없다. 그러나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문화통치로 전략을 바꾸면서,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 ‘모던 보이’를 중심으로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다.

근대화의 굴곡 속 최초의 다방과 시대상을 담았던 커피
일제강점기에 프랑스혁명 때처럼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계몽 및 저항운동은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안국동 네거리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열었다. 이것이 조선인이 문을 연 최초의 다방이다. 영화 ‘밀정’에 카카듀가 재현되었지만, 현실에서는 명확한 장소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종로구 관훈동 3층짜리 벽돌 건물의 1층이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남녀가 밀착해 춤추며 술을 마시는 일본식 카페와 카카듀는 품격이 완전히 달랐다. 조선 지식인들은 카카듀에서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1928년 기념행사를 여는 등 계몽활동을 벌였다. 이경손은 1931년 일제가 문화통치를 접고 말살통치에 나서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의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천재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도 1930년대 ‘제비’, ‘카페 쓰루’, ‘무기’ 등 다방을 열었다. 그가 생계를 위해 다방을 열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다방을 문인들의 모임 장소와 지식인과 일반인의 교류 장소로 활용하면서 끊임없이 창작과 계몽의 혼을 불살랐다. 자신도 다방을 연 이후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일제강점기 의미 있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26년 ‘위생대감’ 증보판에 처음으로 커피의 효능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렸다. 종두법을 최초로 도입한 지석영과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 박영효가 서문을 썼는데, 가정 비치용 의학 백과사전이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 ‘백과전서’ 편찬을 통해 “지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신념을 시민들의 뇌리에 깊이 새김으로써 대혁명을 이끌어낸 것처럼, 우리 지식인들도 비슷한 노력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 달 새 일본군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 7만 명이 들어왔고, 5년가량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미군 부대를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흘러나와 일반에 퍼지게 되는데, 당시 커피는 ‘설탕을 탄 서양탕국’으로 불리며 호기심을 자아냈다. 값이 싸진 것과 함께 회충퇴치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6·25전쟁 중 커피는 피난민 사이에서 목격됐다. 인스턴트 커피의 등장으로 가격이 내렸다고 하지만 주요 고객은 여전히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이었다. 전장에서의 충격과 상실감, 허무함은 지식인들 사이에 염세주의를 낳았다. 1950년 부산 남포동 스타다방에서 시인 전봉래가 음독자살하고, 1951년에는 부산 ‘밀다원’에서 시인 정운삼이 자리에서 조용히 유서를 쓰고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커피는 시대를 반영한다.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근대화 이후의 커피
전쟁이 끝나고 제1공화국이 출범한 뒤 사회가 다소 안정되자 커피는 중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린다. 1955년 편찬된 ‘가사교본: 요리실습서’에는 커피 끓이는 법이 수록됐다. 커피는 대중화 물결 속에서도 문화의 징표로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로버트 가드 중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면서 준 선물이 커피잔 세트였다.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에 ‘학림다방’이 문을 여는데, 다방이 지식인의 사랑방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낭만의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군을 통해 전해진 것은 커피만이 아니었다. 팝송도 퍼지면서 젊은이들이 팝송을 듣기 위해 다방을 찾았고, 다방은 생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연장으로 변모했다. 1960년대 중반 명동, 종로, 충무로 등지에 DJ박스를 설치한 음악다방이 등장했다. 명동에 있던 ‘심지다방’은 좌석이 400석 규모로, 보유 음반이 2,000장에 달했다.

대중화에 도사리고 있는 퇴폐화의 부작용을 커피도 겪어야 했다. 손님들을 끌기 위한 다방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마침내 ‘얼굴마담’과 ‘레지’라는 직업군을 만들어냈다. 산업화 물결을 따라 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몰려든 인파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1970년대 갈 곳 없는 무직자나 한량들은 50원 커피 한 잔 값으로 종일 다방에서 진을 치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당시 50원은 근로자들에게 적은 돈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22세의 청년 전태일은 하루 14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이 겨우 커피 한 잔 값이라며 절규했다. 1976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간편하게 물에 타 마시는 ‘커피믹스’가 개발되고, 1978년에만 커피자판기 1,100대가 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되면서 커피는 우리의 일상을 깊이 파고들었다. 하루 평균 총 15만 컵이 판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1978년 말 전국의 다방은 1만 752곳에 달했고, 서울에서만 4,000곳에 육박하는 등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1999년 7월 스타벅스가 국내에서 문을 열면서 원두커피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한국 다방 역사에서 2,000년대는 ‘커피 전문점의 춘추전국시대’로 기록된다. 어떤 커피를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의 특성을 말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두커피가 음용자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이 땅에서 계몽과 각성을 도모하는 아지트로 시작된 다방은 이제 커피의 향미에서 비롯되는 관능적 행복을 만끽하는 문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글 | 박영순_커피비평가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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