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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의 즐거움 | 씨름

전통씨름의 대동놀이적 성격과 제의성

씨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김홍도金弘道의 씨름 그림이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내가 상대를 물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과 씨름판의 이모저모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씨름의 방식이다. 1927년에 조선씨름협회가 결성된 뒤 공식적인 씨름은 모두 오른쪽 허벅지에 다리에 다리샅바를 거는 왼씨름으로 통일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왼쪽에 다리샅바를 거는 오른씨름, 허리에 샅바를 두르는 통씨름, 오른쪽 팔에 두른 띠를 상대의 왼쪽 허벅지에 감은 뒤 벌이는 띠씨름, 샅바 없이 상대의 허리춤을 잡고 하는 민둥씨름 등 다양한 방식의 씨름이 전승되었다. 김홍도의 그림에 나오는 씨름은 띠씨름으로서 주로 서울, 경기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씨름의 다양한 모습
씨름이 온몸을 이용해서 벌이는 겨루기 놀이인 만큼 그 기술도 매우 다양하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단오의 풍속으로 소개한 씨름의 기술은 내구內句, 안기술, 외구外句, 바깥기술, 윤기輪起, 돌림기술 등으로 단순하지만 1984년 대한씨름협회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무릎치기와 오금당기기 등 손기술 11개, 다리걸기와 호미걸이 등 다리기술 11개, 들배지기와 돌림배지기 등 허리기술 12개, 잡채기와 자반뒤집기 등 혼합기술 20개 등 다양한 기술이 전승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씨름은 개인의 힘과 기량을 겨루는 놀이로서 상대놀이 또는 소집단놀이로 전승되었고, 연행의 시기는 주로 단오와 백중이며 대전방식은 맞붙기토너먼트나 돌려붙기리그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를 통해 우리의 전통씨름이 대동놀이로도 전승되었고 제의성을 갖고 있었으며, 지워내기라는 독특한 진행방식도 있었음이 드러났다. 전통사회에서 전승된 놀이는 연행주체의 규모에 따라서 개인놀이, 상대놀이, 소집단놀이, 대동놀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개인놀이는 말 그대로 혼자 하는 놀이이고 상대놀이는 짝을 이루어 하는 놀이이며, 소집단놀이는 성과 연령, 신분 등에 따라 소집단을 이루어 즐기는 놀이이다. 이에 비해서 대동놀이는 명절이라는 축제의 시공간에서 주기적 연행, 지연공동체 구성원 대다수의 참여와 후원, 소속 지연공동체에 대한 강한 귀속감, 공동체제의 및 공동체신과 일정한 연관성 등을 바탕으로 전승된 놀이라는 점에서 다른 놀이와 구별된다.

씨름 | 김홍도 | 국립중앙박물관

대동놀이로 전승된 씨름
전통씨름은 일상적 씨름과 명절씨름의 순환적이고 상보적인 관계를 통해서 전승되었다. 일상적 씨름은 대개 임의성을 지닌 개별적 놀이활동이었으나 명절씨름 가운데 일부는 공동체 차원에서 벌이는 대동놀이였다.

| 사례1) 1930년대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와 봉기리의 씨름 |
대보름 동제를 마치면 밤에 횃불을 들고 두 마을의 경계지점인 개울가의 논밭으로 나아간다. 이때 서낭대가 앞장서며 대다수의 남성은 물론 여성들까지 따라나선다.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남성들이 씨름판에 나서는데, 마당따께씨름[애기씨름]으로부터 시작해 중씨름[포씨름]을 거쳐 상씨름에 이른다. 대전방식은 지워내기로서 이긴 사람은 물러나지 않고 자신이 질 때까지 계속해서 상대를 바꿔가며 싸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마침내 상대편에서 더 이상 나올 사람이 없으면 “판을 땄다”, “판을 막았다”라고 하며 최후의 승자는 ‘판맥이’ 또는 ‘판맥이장사’라고 부른다.

일반적 씨름과 대동놀이로서 씨름을 구분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전자가 개인의 역량과 승리를 중시하는 데 비해, 후자는 공동체의 역량과 승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위 사례의 씨름은 인접한 두 마을 남성들이 대부분 참여해 벌인 대동놀이로서 최종 승자를 가리기까지 진행방식은 지워내기였다. 지워내기는 맞붙기나 돌려붙기와 달리 이긴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질 때까지 계속해서 싸워 나가는 제3의 진행방식으로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하수부터 고수까지 순차적으로 경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연령과 체급 그리고 실력 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절된다. 이 방식으로 진행되는 씨름판에서 한 씨름꾼이 상대편의 씨름꾼을 제압해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을 때, “판을 땄다”, “판을 막았다”, “판을 때렸다”라고 하며 그 사람을 ‘판맥이판막음’ 또는 ‘판맥이판막음장사’ 라고 한다.『동국세시기』의 씨름 기록을 보면, ‘자주 겨루어 거듭 이긴 사람’, 즉 최종 승자를 ‘도결국都結局’이라 했는데, 도결국은 ‘씨름판을 모두 매듭지은 사람’으로서 판맥이판막음장사에 다름 아니다. 지워내기 방식은 두 마을의 대항전뿐만 아니라 여러 마을이 모여서 벌인 씨름판에도 적용되었다.

| 사례2) 1930년대 경북 청도군 푸악면 일대의 사통씨름 |
대보름 명절이 되면 씨름판을 열 뜻이 있는 마을에서 인근 마을에 ‘사통’을 돌린다. 사통은 ‘아무 날 저녁에 우리 마을에서 씨름판을 여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글 또는 말이다. 사통을 받은 마을의 주민들이 정해진 날 서낭대를 앞세우고 사통을 돌린 마을로 찾아가면, 그 마을에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해 대접하고, 경우에 따라서 무명 1필 정도를 상품으로 내놓는다. 보통 5~6개 마을이 모여 씨름을 하는데, 마당따께씨름부터 시작해 중씨름과 상씨름으로 진행되며 대전방식은 지워내기이다. 판을 막은 씨름꾼이 속한 마을 주민들은 그의 승리를 마을의 승리로 생각했으며 마을로 돌아와 잔치를 벌였다.

마을대항전으로 벌인 씨름에서는 소속 마을의 위신과 명예가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였고 개인의 위신과 명예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이러한 양상은 황소나 송아지를 걸고 벌이는 큰 규모의 씨름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씨름꾼은 대개 소속 마을로부터 위임받은 대표성을 바탕으로 씨름에 참여했고 주민들은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우승할 경우 그 상품을 마을잔치를 위해 내놓기 마련이었다.

공동체제의와 관련된 씨름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씨름의 제의성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의 각저총벽화를 들 수 있다. 그림을 보면 네 마리의 까마귀, 혹은 까치가 앉아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두 사람이 웃통을 벗은 채 씨름을 하고, 한 노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때의 나무는 무용총과 감신총의 나무처럼 신수神樹이므로, 그 나무 아래서 벌인 씨름도 일정한 제의성을 수반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그림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씨름과 장례의 상관성이다. 무덤에 씨름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씨름이 죽음 또는 죽음과 관련된 제의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의 시는 씨름과 공동체제의의 관계를 보여준다.

정견신모正見神母 사당에서
해마다 봄 제사 드리고
한바탕 씨름으로 자웅을 가리네
돌아오는 길 신상神像을 겨루며
옛춤으로 어울리니
달이 떠오르매 긴소매 펄럭이네

  • 박규수(朴珪壽), 『환재집(瓛齋集)』 1권 –

가야의 왕모로서 가야산의 산신이 된 정견신모에 대한 제사와 이어지는 씨름판, 그리고 귀로의 춤놀이가 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시가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봄 제사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씨름이 입춘 또는 대보름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씨름이 공동체신에 대한 제사에 이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축제 가운데 공동체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 뒤 대동놀이를 벌이는 〈선제사 후놀이형〉에 속하는데, 이 유형의 축제에서 대동놀이는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오신娛神 행위 또는 봉헌물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의 자료 역시 공동체제의와 씨름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 사례3) 1930년대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중미와 내산마을의 씨름 |
대보름 자시에 동제를 지내면 그날 밤에 유가사 앞마당에 횃불을 피워놓고 중미와 내산마을 간에 씨름이 벌어졌다. 각 마을에서는 서낭기를 앞세우고 씨름판으로 나아가 씨름을 벌였다. 내산은 유가사의 대처승들이 주로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씨름꾼도 대개 스님들이었다. 대전방식은 지워내기였고 애기씨름부터 시작되해 중씨름을 거쳐서 상씨름으로 나아갔다. 상대편 마을에서 더 이상 나올 사람이 없으면 승부가 결정되었다. 씨름이 끝나면 유가사에서 차려낸 음식을 함께 먹으며 신명나게 놀았다.

이 씨름은 이미 살펴본 사례1, 2와 마찬가지로, 대보름 동제 뒤에 벌어지고, 씨름판에 서낭신의 움직이는 신체神體로 간주되는 서낭기가 함께 한다. 하필이면 추위가 한창인 시기에 주민들이 서낭신을 모시고 함께 모여 일상적 씨름과 다른 편싸움便戰형식의 씨름을 벌인 것은, 이 씨름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동제의 연장선에서 서낭신을 위해 벌인 제의적 행위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우리의 전통씨름 가운데 지워내기 방식으로 진행된 일부 지역의 명절씨름은, 대동놀이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 특히 씨름의 제의성은 몽고와 중국, 일본의 씨름에도 나타나는 것으로서 우리 씨름이 동북아시아 씨름의 보편성을 공유하면서 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글 | 한양명_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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