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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쪽 문화사 | 영화관의 변화

개항장의 외국인 극장에서 넷플릭스까지

우리나라에서 극장은 19세기 말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이 개항장에 만들어 운영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 무렵 일본과 중국의 흥행단체들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 바닷길을 따라 부산이나 인천으로 왔다. 공연을 통해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관객과 관객 아닌 사람들을 구분시켜 주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이들 흥행단체들은 개항장에 실내 공연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극장은 특히 일본인들이 세운 극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세기 말에 발명된 영화는 상품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 영화 상영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3년 6월,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1)이 상영되었다는 신문기사이다. 이곳은 곧 ‘동대문활동사진소’로 발전하게 되는데 창고를 개조한 공간이었다.
영화는 햇빛을 차단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이라면 어디든지 상영될 수 있었다. 1907년에는 서대문정차장 주변의 ‘아스터 하우스Astor House’라는 호텔의 연회장에서도 영화가 정기적으로 상영되었다. 그 외에 사진관이나 강당 등 실내 공간 어디서든 영화가 상영될 수 있고 심지어 밤에는 야외에서도 상영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상영되었던 최적의 장소는 바로 극장이었다. 극장은 스크린과 객석이 구분되어 관람에 용이했으며, 흥행업자의 입장에서는 관객과 관객 아닌 사람을 구분지을 뿐만 아니라 관람 위치에 따라 요금을 차등해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관이 만들어진 후에도 그곳을 보통 극장이라 불렀다.

 

근대 초기의 영화관과 영화산업의 등장
최초의 영화관은 1910년 영업을 시작한 ‘경성고등연예관’으로 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로 넘어와 만든 영화관이다. 이곳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기 위한 공간이었기에 영사실을 따로 갖추고 있었다. 영사실은 화재가 영화관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을뿐더러 영사기의 소음도 차단할 수 있었다. 영화관이 크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1930년대 토키영화2)가 상영되면서부터이다. 토키필름은 무성영화필름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비쌌기에 영화관 운영자들은 비싼 관람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비싼 관람료를 내고 들어온 관객들은 그에 걸맞은 공연 환경을 요구하였다. 단성사를 시작으로 토키극장으로 신축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 중후반에 만들어진 명치좌, 황금좌, 약초극장은 1,000석이 넘는 객석을 가진 해방 당시까지 서울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다.

전쟁 후 오락의 중심은 영화였다. 전국에 많은 수의 영화관이 새롭게 탄생했다. 특히 외화 수입업자들이 영화관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다 보니 전국에 수십 개의 영화관을 거느린 극장 재벌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70밀리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대한극장이나 국제극장과 같은 대형 스크린의 영화관이 도입되기도 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입장세법入場稅法 개정을 통한 국산영화면세조치로 영화관에서는 한국영화의 상영을 원했고 이를 위해 영화관 업자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리거나 영화 제작에 자금을 투입하면서 한국영화 제작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제작 관행은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데 이를 소위 ‘충무로 제작 시스템’이라 불렀다.

충무로 제작 시스템은 서울의 극장을 소유한 영화제작사 혹은 서울의 극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제작사가 지방극장을 소유한 흥행사들과 돈을 나누어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지방 투자자들에게는 그 지역의 흥행 권리가 주어졌다. 영화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자칫 흥행 실패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영화산업의 변화와 영화관의 변화
1970년을 정점으로 하여 영화산업이 침체한다.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 텔레비전은 1980년대 초에 이르면 거의 100%에 육박하는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보급에 비례하여 폐업하는 영화관의 숫자 역시 급격히 늘었다. 10년 사이 전국의 영화관 숫자는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는 그만큼 영화산업의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1980년대 초반 소극장 설립이 자율화된다. 이전까지 극장과 영화관의 설립은 복잡한 규정과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300석 미만의 객석을 지닌 작은 극장을 1000석에 가까운 극장에 맞춰 정해진 규정을 따라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극계가 중심이 되어 소극장 설립 자율화를 추진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300석 미만, 300㎡ 이하 규모의 극장에 한해서는 설립의 자율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소극장 설립을 자율화하자 문 닫는 중대형 영화관을 대신하여 도심의 빌딩 안에 소극장이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만들어졌다. 대형 극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줄어든 객석 수를 소극장이 대신 채운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객석 수를 유지시킴으로써 한국영화 산업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1980년대 중반 한미무역협정 개정을 통해 한국의 영화산업에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바뀌었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수입 개방 조치로 이어졌다. 한국영화시장에 진출한 할리우드의 영화 회사들은 짧은 시간 큰 수익을 원했다. 하지만 당시 존재하고 있던 프린트 벌수 제한 규정으로 인해 전국의 10개 미만의 영화관에서만 같은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의 영화회사들은 전국의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스크린에서 한꺼번에 영화를 상영하고 그 수익을 얻어 가는 전략을 취하기 위해 우리 정부에 압력을 넣어 ‘외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철폐시킨다. 이러한 조치가 시행되자 1000석 이상의 거대한 극장 한곳에서 장기간 상영하는 방식은 옛날 것이 되었다. 이제는 소극장 규정을 받는 300석 미만의 객석을 가진 다수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동시 다발적으로 상영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이러한 영화산업의 변화에 맞춰 전국의 극장들은 변화를 꾀하게 된다. 기존의 극장의 내부를 수리하여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가진 소극장으로 개조하는 방법을 꾀하는가 하면 아예 극장을 새로 지으면서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multiplex 영화관으로 건축하였다. 강남의 시네하우스와 강북의 ‘서울시네마타운’이 이러한 경우였다.

복합문화공간에서 안방극장으로
199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에 대기업의 자금이 흘러든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대한 투자도 이어진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설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회사가 CJ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호주와 홍콩의 영화회사와 손잡고 우리나라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가져오게 된다. 가장 먼저 강변역 부근에 새롭게 들어선 테크노마트 안에 자사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강변CGV’를 입주시킨다. CJ에서 세운 멀티플렉스 영화관 체인인 ‘CGV3)’는 기존의 거대한 단관극장이나 혹은 시내에 새로 생기기 시작한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강변역과 동서울터미널이라는 교통의 요지에 영화관이 들어서 있어서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았다. 또한, 거대한 쇼핑센터 안에 위치하게 되면서 주차환경도 개선되었다. 특히 쇼핑센터 안에는 푸드코트food court 등도 갖추고 있었는데, 건물 안에서 쇼핑과 식사, 영화 관람까지 한꺼번에 다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 복합 문화공간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탄생은 이전의 극장을 낡은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렸다. ‘강변CGV’의 성공으로 메가박스나 롯데시네마와 같은 도심의 교통 요지에 들어선 쇼핑센터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극장의 표준이 되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인해 기존의 영화관은 폐업하거나 재건축을 통해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탄생한다. 하지만 ‘강변테크노마트’와 같은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으로의 확장이 불가능했다. 도심에 들어선 이러한 영화관들은 대부분 실패하여 사라지거나 거대 회사들의 멀티플렉스 체인 안에 흡수되었다.

팬데믹Pandemic 시대 영화관은 넷플릭스4)로 대표되는 안방극장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성능이 뛰어난 텔레비전이 스크린을 대신하고 있으며 수천 편의 영화 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영화관은 3D영화와 같은 특정한 장르의 영화들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관 탄생 100여 년 만에 큰 변화의 순간에 우리가 서 있는지도 모른다.

1) 1895년 최초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Lumière)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의 바이타그래프(vitagraph)가 1897년 일본에 들어오면서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2) 영상과 동시에 음성대사, 음악 등의 사운드가 함께 나오는 영화
3) 1996년 우리나라 CJ그룹과 홍콩의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Village Roadshow)가 합작한 회사로, 3개 회사의 첫 알파벳을 따서 명명되었음.
4) Netflix는 TV 프로그램, 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콘텐츠를 수천 종의 인터넷 연결 지원 디바이스에서 시청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


글 | 한상언_영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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