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박물관 기고 | 유두 풍속

더운 여름 물맞이, 유두流頭 풍속

머리를 감으며 더위를 잊다
음력 6월 15일 유두流頭는 소두梳頭, 수두水頭라고도 하며,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머리를 감는 날’이다. 유두는 여름철 가장 덥다고 하는 삼복三伏 사이에 들고, 모내기도 마친 시기이기에 사람들은 물이 흐르는 냇가나 폭포 등을 찾아 멱을 감으며 더위를 잊었다. 이때 가져간 제철 과일과 음식을 가족끼리 나누어 먹는 모습이 흡사 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아 ‘유두잔치’라고 하였다.

선비들 역시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정자나 계곡에 나아가 풍월을 읊는 등의 풍류를 즐겼는데, 이를 유두음流頭飮이라 하였다. 아울러 흐르는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6월에 수확한 올벼나 과일, 밀로 만든 국수나 전병을 사당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을 ‘유두천신’이라 하였다. 또한, 벼가 잘 여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논의 물꼬에 제물을 차리고 농신農神에게 고사를 지냈다. 이처럼 유두에는 더위를 이겨내고,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풍속들이 연행되었는데, 조선 후기의 유학자 정동유鄭東愈는 자신의 저서인 『주영편晝永編』에서 유두가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임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6~7세기 경 중국의 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등을 보아도 유두와 관련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유두라는 명절과 관련된 여러 풍속이 전해 내려오는 만큼 그와 연관되어 남겨진 다양한 시와 그림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수욕도水浴圖’라고 이름 붙여진 그림들은 상당 부분 유두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중인들의 풍류 모임 중 유명세를 지녔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1) 등이 관련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유두와 관련되었다 여겨지는 작품이 다른 내용으로 오인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 예가 신윤복의 걸작 ‘단오풍정’이다.

신윤복의 ‘단오풍정’ 표제에 대한 의문
1970년 12월 30일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신윤복 필 풍속도화첩혜원전신첩』은 ‘단오풍정端午風情’을 비롯해 모두 30여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2)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전형필이 구입하여 새로 표구를 하고,3) 이때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새로 표제와 발문을 썼다. 그 가운데 단오풍정은 그림 속에 단오에 즐겼던 그네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표제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 계몽 운동가로, 일제 강점기에는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서화와 고미술품 등 골동품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일본으로 유출된 조선의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일에 앞장섰다.

단오풍정 | 신윤복 | 28.2×35.6cm | 간송미술관

1915년 1월 13일자 『매일신보』에 「별견서화총瞥見書畵叢」이라는 제목 기사에는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珍籍書畵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 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 10여 년 이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東購西買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는데, 그중 150점은 그림이다. 오세창이 동서로 뛰어다니며 골동 서화를 구매한 까닭은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 전통문화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헐값으로 일본에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라고 그가 전문적으로 골동 서화를 구입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0만 석 거부의 상속자인 전형필이 1929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골동 서화를 수집하며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나, 역시 일본 대학에 유학했던 오봉빈이 1929년에 광화문 당주동에서 신구新舊 서화 전시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조선미술관을 개관하는데 권고와 지도하였다. 특히,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는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되었다고 한다.4)

단오풍정 그림의 내용을 보면 산에서 흐르는 물에 네 명의 기생들이 목욕을 하고, 한 여인은 목욕하는 이들을 보면서 그네를 타기 위해 발을 얹는 모습이다. 두 명의 기녀는 산자락에 앉아 올림머리를 풀고 정돈하고 있으며, 방물장수는 이들 기녀들에게 화장품, 복식 등을 팔기 위해 오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두 명의 청년들은 기녀들의 목욕하는 모습을 바위 뒤에서 훔쳐보고 있다. 필자는 이 그림을 음력 6월 15일 유두流頭 물맞이 풍속을 묘사한 것으로 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유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준말에서 왔다. 양기가 강한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고 목욕하면 부정한 것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려 희종 때의 학자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에도 “동도東都: 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고 기록하여 유두 물맞이 풍속이 이미 신라시대에 행해졌음을 말한다.

위의 기록에 근거하면 신윤복의 풍속도는 기생들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는 유두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네보다 목욕하는 여인들에 주목한다면 유두 풍경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해 단오에 여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 삼고, 창포를 넣어 삶은 물로 머리를 감았다. 즉, 단오에 여성들은 집안에서, 유두는 산의 계곡을 찾아 목욕을 하며 물맞이를 한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상식』에는 여자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의 정릉계곡, 광주의 무등산 물통폭포, 제주도의 한라산 성판봉城坂峰폭포 따위를 꼽았다. 이 말은 산의 계곡이나 폭포에서의 물맞이는 여성들이 하였으며, 남성들은 강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더위를 잊었다. 즉 유두절에 남녀가 각각 즐기는 장소를 구분하여 남녀의 내외를 지켜준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젊은 머슴들이 몰래 기녀들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본 것을 신윤복이 놓치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금란계첩 | 작자미상 | 18.5×42cm | 국립중앙박물관

현재도 유두流頭 절기가 되면 더위를 피해 ‘물맞이 가자’고 하여 산과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삼복 절기 사이에 든 유두의 물맞이는 피서避暑이자 직장인에게는 여름휴가로 이름만 바뀌었지 그 전통은 지속되고 있다.

1)1791년 유두절, 옥류동 계속에서 열린 ‘송석원시사’에서 지은 글을 모아 첩(帖)으로 엮은 것.
2)〈연당야유 蓮塘野遊〉·〈기방무사 妓房無事〉·〈청루소일 靑樓消日〉·
〈월하정인 月下情人〉·〈월야밀회 月夜密會〉·〈춘색만원 春色滿園〉·
〈소년전홍 少年剪紅〉·〈주유청강 舟遊淸江〉·〈연소답청 年少踏靑〉·
〈상춘야흥 賞春野興〉·〈노상탁발 路上托鉢〉·〈납량만흥 納凉漫興〉·
〈임하투호 林下投壺〉·〈무녀신무 巫女神舞〉·〈주막 酒幕〉·
〈쌍검대무 雙劍對舞〉·〈휴기답풍 携技踏楓〉·〈쌍육삼매 雙六三昧〉·
〈문종심사 聞鐘尋寺〉·〈정변야화 井邊夜話〉·〈노중상봉 路中相逢〉·
〈계변가화 溪邊佳話〉·〈삼추가연 三秋佳緣〉·〈표모봉심 漂母逢尋〉·
〈야금모행 夜禁冒行〉·〈유곽쟁웅 遊廓爭雄〉·〈이승영기 尼僧迎妓〉·
〈이부탐춘 嫠婦耽春〉·〈단오풍정 端午風情〉·〈홍루대주 紅樓待酒〉
3)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4)이승연, 『위창 오세창』, 이회문화사, 2000., 허경진,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오세창」, 『조선의 중인들』, RHK 두앤비컨텐츠, 2015.


글 | 정연학_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