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80주년 기념사
‘세계의 창’을 여는 국립민속박물관
장상훈(국립민속박물관 관장)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1946년의 일입니다.
험난했던 일제 강점의 시간 속에서도 한국 문화의 명맥을 지켜내며 광복을 맞으신 83세의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께서는 광복 직후 국립민족박물관의 설립을 이끈 송석하宋錫夏, 1904~1948 관장에게 ‘博綜文物박종문물’이라는 휘호를 써주셨습니다.
‘박종’. 넓게 모아 뜻을 풀고 이치를 추구하는 일.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의 글 중에도 “博綜馬鄭박종마정”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추사의 제자였음을 떠올리면 선생의 ‘박종문물’ 휘호가 그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동서고금의 삼라만상을 담은 문물을 모아 궁구하고 새로운 세계 문화 창조의 영감을 제공함으로써 인류의 나아갈 길을 밝히는 과업.
해방공간의 혼란한 시간 속에서 피어난 가녀린 문화의 새싹이 강건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위창 선생은 이렇게 기원해 주셨습니다.
이 네 글자 휘호에 담긴 뜻은, 해방공간에서 문화 독립을 꿈꾸던 43세의 송석하 선생에게도, 그리고 한류의 바람이 전 세계를 감싸고 있는 2020년대의 우리에게도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이제 1946년 4월 25일 국립민족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제시한 비전을 떠올리려고 합니다.
이 박물관은 한국 문화뿐 아니라 다른 민족 문화 연구의 전당을 표방했습니다. 이 박물관이 영문명을 “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로 정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49년 12월 정식으로 제정된 직제에서도 국립민족박물관은 “민족 문화 및 인류학 영역에 속한 참고품을 수집 진열하여 일반 대중에게 관람케 하고 아울러 그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행한다”는 임무를 설정했습니다. 비록 국립민족박물관이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크나큰 시련 속에서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지만 이 박물관의 사명은 결코 잊히지 않았습니다.
1966년 한국민속관, 1975년 한국민속박물관, 197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국립민속박물관, 1992년 문화부 직속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성장하며 생활문화를 바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습니다. 2008년 직제에서는 “우리 민족과 세계 각국의 생활양식, 풍속 및 관습”을 고루 이해하는 것이 박물관의 지향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지난 2025년 국립민속박물관은 ‘세계로 열린 창’이라는 비전을 설정하고, 이를 구체적인 사업으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구촌 방방곡곡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로써 상호 이해, 존중과 공존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세계적인 무역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급격히 다문화 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한국 사회가 게을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것만큼 타문화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수사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자국의 전통만으로 진정한 문화 창조가 가능한 것인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 치고 타문화의 이해와 수용에 인색했던 곳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 앞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속없는 이가 있고, 친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의 애환에 귀 기울이는 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를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친구가 되어야 합니까.
김구 선생이 희구하셨던 문화의 힘은 진정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 사회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국립민속박물관은 이러한 시대사적 과제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비교민속이라는 과제를 일찍부터 설정하고 조사·연구부터 수집, 전시,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선순환 체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샤먼, 청바지, 소금, 인형, 가면 등 일상의 소재에 주목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인류문화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밝히고 이를 대중과 공유하는 일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특히 일찍이 2007년부터 ‘다문화꾸러미’라는 획기적인 교구 상자를 제작 보급하여, 한국의 다문화 사회 전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습니다.
‘세계로 열린 창’이라는 비전은 오는 2031년 세종시에 새 청사를 건립하고 개관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데도 필수적입니다. 지방의 정체, 쇠퇴, 그리고 소멸까지를 고민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시대사적 과제는 더 이상 논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인프라를 지역에 분산하는 일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축적한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을 세종 신관에서 새롭게 펼쳐냄으로써 세계시민을 기르는 박물관을 조성하는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 현 청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기대에 부응할 방법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2025년 국립민속박물관은 228만여 명의 관람객을 맞이했으며, 이 중 135만여 명이 외국인이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절대 숫자 면에서나 비율 면에서나 외국인 관람객 유치에서 압도적인 1위 박물관입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93년과 2021년 각각 선을 보인 《한국인의 일생》, 《한국인의 일 년》 상설전시관은 전 세계 박물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콘텐츠입니다. 한국인들의 특성을 찾아 전시실에 들어선 외국인 관객들은 결국 삶의 보편성을 느끼며 박물관을 나섭니다.
이처럼 세종과 서울에 각각 세계민속과 한국민속을 전담하는 상설전시관을 구축함으로써, 한국 문화와 세계 문화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도모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어떤 시간과 공간에 있던 사회와 문화도 삶의 보편성 위에 서 있기에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오랜 축적을 기반으로 이제 널리 세계 속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이제 부쩍 성장한 한국 사회의 품에 걸맞은 다양한 시각과 너른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김구 선생이 품었던 꿈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생활문화 박물관으로 동서고금의 삼라만상 속에 깃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우리 그리고
지구촌 이웃들의 소중한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이겠습니다.”
2026. 4. 25.
개관 80주년을 맞으며,
관장 장상훈 올림

민속소식 제314호 (2026년 3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