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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저 장가갑니다, 장인 집으로

“아침에 오수 찰방 정지丁至가 들렀는데, 그에게 1월에 광선이 남원 김 사과 집에 실을 얻을 때, 위요圍繞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가 말하기를, ‘좋습니다. 신랑을 맞아서 오수에서 재우고 옷을 갈아 입혀 역마를 태워 입장入丈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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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중 전안지례奠雁之禮를 그린 그림.
촛대·목안木雁·술잔 등이 놓인 전안상 앞에서 의례를 행하고 있다. 그림 김준근
결혼합니다
장인 집에 방 하나 얻어서요

 

1575년 11월 16일에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자신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손자 광선의 혼인을 앞두고 친구 아들인 정 찰방에게 일종의 들러리가 될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장면이다. 

‘실을 얻는다’는 말은 얼마 전까지도 남자가 혼인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남자가 혼인을 하고 자신의 방을 얻는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도 이 말은 쓰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에서는 남자 집이 아니라 유희춘 손자처럼 여자 집에 방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뒤의 구절과 함께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광선을 역마를 태워 입장하게 하겠습니다’에서 ‘입장’이란 장인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장가드는’ 것이다. 요즘도 ‘장가간’다는 말을 하는데, 그 유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광선은 집이 담양이지만, 남원의 장인 집으로 장가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 광선은 혼인 후 잠깐 본가에 들르는 것 외에는 내처 남원에서 살았다.

조선 초기 혼인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례식을 하고 여자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남귀여가男歸女家’라고 부르고 있다.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중국 혼인에서 ‘귀’란 여자가 결혼해서 시집으로 오는 것을 말하는데, 조선에서는 이 말이 남자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이를 자주 논쟁거리로 삼았다. 중국처럼 여자가 남자 집으로 가는 혼인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에는 이러한 혼인 형태가 있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고대 이래 권력이나 신분을 유지하는데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흡수하는 형태보다는 두 집단이 공존하면서 상황을 주도해가는 것을 더 편리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건국 때 박혁거세와 알영이 함께 통치한 것, 주몽과 소서노의 관계, 고려 태조가 29명의 부인이 필요했던 것 등은 모두 부,모나 부,처로 대표되는 두 집단이 적절한 공존과 협력 관계를 원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혼인은 양쪽 집안의 공조를 바탕으로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관계가 비교적 대등하고 긴밀하며, 상호 의존적인 경우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아직까지 왜 이러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조선 시대까지도 지속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조선 내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은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는 혼인 형태를 문제 삼았고, 점차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혼인 즉 여자가 남자 집으로 가는 혼인친영, 親迎으로 바꾸려고 적극 노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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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중 합근지례合근之禮를 그린 그림.
신부가 대례상 앞에서 술잔에 술을 붓고 있다. 그림 김준근
우리 며느리가 온대요
친정으로 간 지 2년 만이네요

 

1828년순조 28 10월 22일 노상추는 네 번째 손자 명탁의 신부를 맞이한다. 이 신부는 혼인한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시댁으로 오는 이른바 신행新行을 하고 있다. 같은 해 4월, 명탁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식을 했고 신부는 그대로 자기 집에 머물다가 이때에 비로소 시댁으로 오는 것이다. 

노상추는 명탁이 혼인하러 갔을 때, 따라 갔던 노비들이 돌아와서 ‘신부 집의 접대가 후하고 신부가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아주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니까 노상추는 손주며느리를 얘기로만 듣고 직접 보지는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신부는 신행 이틀 후 정식으로 시부모를 뵙는 의식을 치르고 할아버지인 노상추에게는 삼 일째에 인사를 했다. 노상추는 거듭 신부가 믿을만한 됨됨이를 가졌다며 좋아한다.

 

19세기 초반 노상추 손자의 경우는 혼인 후 여자가 자신의 친정에 머무는 기간이 6개월로 짧아졌다. 물론 이 6개월은 어느 집이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8세기이기는 하지만, 권상일 집안의 경우에는 며느리가 2년 여가 지나서 손자까지 낳은 후에 시댁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여자가 혼인 후 친정에 머무는 기간이 짧아지는데, 그것이 대개 1, 2년 즉, 이른바 해묵이라고 불릴 정도가 된다. 해묵이는 신부가 자신의 집에서 해를 넘긴 후에 시댁으로 온다는 뜻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이제 남귀여가혼은 ‘해묵이’ 정도의 유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초기와 달리 부계성이 강해지고 남자 집안 중심의 혼인이 이루어지게 됐다고는 해도 조선 후기 여전히 여자 집안의 영향력은 중요했다. 대사회적인 이익을 얻는데 여자 집안의 서포트가 중요했고, 자식들의 위치에 미치는 영향도 강력했다.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아닌 경우 그 자식은 서얼로서 완전한 양반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대표적으로 여자집안의 배타적 권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장가를 가든 시집을 가든
조선에 이혼은 없습니다

혼인 형태가 장가드는 것에서 시집가는 것으로 변해도 조선에서 남자 집안과 여자 집안의 긴밀한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비중이 남자 쪽으로 많이 옮겨졌지만, 그렇다고 여자 쪽이 완전히 미미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각 집안들은 한번 맺은 인연을 쉽게 해소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해서 맺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가 가능하면 이혼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과 맞아떨어졌다.

 

조선은 <대명률>조선시대 현행법•보통법으로 적용된 중국 명나라의 형률서을 가져다 썼지만, <대명률>에 있는 이혼관련 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항상 ‘조선에는 이혼하는 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조선 후기 신태영이라는 여자는 남편과 번갈아 가며 여러 차례 이혼 소송을 했지만, 끝내 국가로부터 허락을 받지 못했다.

 

흔히 조선에서 ‘칠거지악’이라고 해서 여자를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에서 ‘칠거지악’은 거의 말 뿐이었다. 남자 집안들은 여자 집안과 관계 유지를 잘 하는 것이 에너지 낭비가 적고, 또 사회적 이익을 얻는데도 보탬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정책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특히 후기에 이혼은 거의 없었으며 두 집안의 관계는 매우 공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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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이순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저로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공저, 두산동아, 2005 <조선 양반의 일생>공저, 글항아리, 2009, <조선중기 총부권과 입후의 강>1996, <정부인 안동 장씨의 성리학적 삶>2003,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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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마이신 댓글:

    요즘 주위 친구녀석들이 결혼을 많이 합니다. “과정들이 너무 힘들어 두번다시 결혼은 못하겠다” 는 우스개 소리를 내뱉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쉬이 결혼하고 맹세를 많이 저버리는듯 합니다. 많은 허례허식과 오해들이 쌓여있는 현대의 결혼이지만 그 본질만은 한번맺은 인연을 쉬이 저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에 있는 듯 합니다. 꼭 각 집안과의 이해관계만이 아니어도 내 아내 또는 누군가의 남편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지 않나요? 평생 내편!! 즐거운 결혼생활들 되시길 ~ LEY 보910

  2. 영내꺼 댓글:

    평생 내편♡ 존재만으로 힘이 되네요
    얼른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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