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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소, 말, 철물을 내다 팔아서라도
갖고 싶어

옛날 사람들도 옷장에 하나쯤, 명품이 들어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혼자 피식 웃을 때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이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명품이란 자고로 품질은 물론 유명세, 거기에 아무나 살 수 없을 정도의 가격대로 희소가치가 높아지면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 그러나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누구든 명품을 살 수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명품이었다.

 

초피로 만든 갖저고리와 이엄,
당대 최고의 명품으로 자리잡다

성종 때, 부녀자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명품 중 하나는 초피貂皮로 만든 ‘갖저고리’였다. 초피는 돈피獤皮, 사피斜皮라고도 하는 ‘담비’의 가죽이다. 담비는 족제빗과에 속하는 포유동물로 몸통은 가늘고 길며, 꼬리는 몸통 길이의 2/3 정도로 매우 길다. 털은 부드럽고 광택이 있다. 조선왕실에서 가장 귀하게 여긴 모피로, 최상의 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팔도에서 나는 최고의 물건은 모두 왕실로 진상되던 당시, 초피 역시 진상 품목이었다. 1469년예종 1 공조판서 양성지가 올린 상소를 보자.


모름지기 수륙水陸에 맞춰 공상물을 자세히 정해야 할 것이니 하삼도에서는 면포를 바치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면주를 바치고, 함길도와 강원도에서는 상포常布를 바치고, 또 양계에서는 초피와 서피鼠皮를 바치고, 강원도에서는 나무를 바치고, 황해도에서는 철물을 바치고, 전주와 남원에서는 두꺼운 종이를 바치고, 임천과 한산에서는 모시를 바치고, 안동에서는 돗자리를 바치고, 강계에서는 인삼을 바치고, 제주에서는 좋은 말을 바치도록 하소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토산물 중 최고인 이들 물목 중 양계에서 올린 초피와 서피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다. 서피쥐, 족제비의 가죽는 초피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서피 또한 인기가 높았던 모피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초피와 서피로 어떤 명품을 만들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이엄’과 ‘갖옷’이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머리에 쓰는 방한용 모자로 초피나 서피로 만든 ‘이엄’을 썼다. 남성은 사모나 갓 아래에 썼다. 또 초피나 서피로 만든 코트나 저고리인 구의裘衣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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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모피인 ‘초피’는 족제빗과의 동물 ‘담비’의 털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담비의 몸 길이는 60cm 정도이며 몸체가 가늘고 길다.
색채가 매우 아름답고 윤택이 나며, 털은 치밀하고 부드럽다. 또 가볍고 보온력이 뛰어나 모피 중 최상등으로 쳤다.

 

초피를 가지고 싶다면
벼슬을 하거나 임금의 사랑을 받으라

여기서 초피의 가격을 가늠해 보자. 이엄을 만들려면 고급 비단인 ‘단자’가 꼭 필요한데, 이 단자의 값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일반 비단인 채견綵絹 1필을 초피 6장[령, 초피를 세는 단위], 또는 청서피 130장과 맞바꾸었던 것에 비해 1425년세종 7 윤봉이 중국서 가져온 단자 한 필은 초피 25장과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단자는 채견에 비해 4배 이상 가는 고급 직물이었고, 초피는 서피보다 20배 이상 비싼 물건이었다. 옷감 한 필은 대략 길이 16.35m, 너비 32.7㎝이다.

 

과연 이렇게 비싼 초피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경국대전』에는 당상관의 이엄은 단과 초피로, 당하관부터 9품까지는 초와 서피로 만들도록 규정하였다. 다만 종친은 아래로 6품까지 초와 초피를 사용하도록 했다. 결국, 초피이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6품 이상의 종친과 당상관 이상의 문무관이다. 그러니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신분이 아니면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초피이엄과 초구를 가질 수 있는 예외의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임금이 직접 내려주는 ‘반사초피이엄’이다. 1455년세조 1 종 3품 집의執義 이예李芮에게 초피이엄을 하사하였으며, 1474년성종 5 사은사로 중국에 가는 한명회에게도 아청필단으로 만든 초피이엄을 하사하였다. 또 중국에서 오는 사신에게 특별히 초피로 만든 이엄과 갖옷을 특별히 하사하였는데, 중국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가져가고 싶은 것으로 초피이엄을 꼽을 만큼 그 명성이 자자했다.

 

임금이 초피로 만든 이엄이나 옷을 주는 것은 신하에 대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1658년효종 9 송준길이 하직인사를 할 때의 일이다. 술자리가 끝나자 임금이 입던 초구貂裘한 벌을 주며, “이것은 내가 입던 것이다. 봄 날씨가 퍽 추우니 이것으로 행자를 삼고 부디 날씨가 덥기 전에 올라오라.”고 하자 송준길이 “은혜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승에서는 다 보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과 신하의 정이 초구를 통해 진한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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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에 남성용으로 쓰였던 초피로 만든 ‘이엄’은 시간이 지나 여성을 위한 난모인 ‘아얌’으로 발전했고, 양반계층에서만 사용하던 것에서 점차 평민화 되어 ‘풍차’와 ‘남바위’ 등의 난모가 만들어졌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모피를 찾는 사람들의 애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판화로, 조선 시대 풍차를 쓴 부녀자들의 모습과 남바위를 쓴 노인을 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475년성종 6 당시 젊은 부녀들 사이에서는 초구가 없으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수십 명이 모인 데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구를 입었다고 하니 초구의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젊은 여성이 초구를 입는 것은 따뜻해서가 아니다.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표시이고 표현이다. 즉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다.
이처럼 초피이엄이나 초구는 임금의 하사품이거나 정해진 신분만이 입을 수 있는, 즉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더욱 갈망하는 명품이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초피의 값이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 여기에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사재기해 값은 더 치솟았고, 사람들은 초피를 사기 위해 소, 말뿐 아니라 철물까지도 내다 팔 지경이었다. 당시 화살을 만드는 데 뼈가 아닌 쇠를 썼을진대 명품을 향한 열기가 결국에는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에도 명품 가방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모임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가방 안에 꼭 담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깨에 걸친 명품 가방이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과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진짜든 가짜든 말이다.

 

글_ 이민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선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효명세자 일생을 통해 본 가례복식」, 「국왕의 제복」, 「조선시대 책례복식의 추이」, 「궁중발기를 통해 본 왕실의 복식문화-임오가례시 생산체제를 중심으로」, 「『상방정례尙方定例』의 편찬과정과 특징-왕실복식의 절용節用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과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조선 궁중의 잔치, 연향> <치마저고리의 욕망>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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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김주미 댓글:

    재미있고 더궁금해지는 글입니다.
    조선시대 의복이 더 자세히 고증되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2. 박정아 댓글:

    제목 줄 상단의 풍차를 쓴 여인네와 그 여인네에게 엎힌 유아를 담아낸 그림이 저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어느 책에서 본 그림이라 아주 낯익고 친근했거든요.
    어디서 봤더라??? 글을 다 읽으면 답이 나오겠지 했는데,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이네요.

    이 코너를 본 독자 중에 이 여성이 그린 60점에 달하는 한국의 다양한 풍습과 문화상, 사람들에 관한
    복식, 주거, 놀이, 예식 등의 생활사를 보고 싶다면 란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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