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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백의를 철폐하고, 가정에 염료를 상비합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물감 봉투’는 1920~30년대 가정에서 의복이나 옷감에 물을 들이는 물감을 담았던 봉투이다. 봉투에 쓰인 표현을 그대로 따르면, ‘색의 장려 가정 상비 염료대色衣獎勵家庭常備染料袋’가 보다 정확한 이름이다. 색을 들인 옷 입기를 장려하기 위해 가정에 두고 사용하도록 보급한 염료 봉투인 셈이다. 세로 21.3cm, 가로 14.5cm 크기의 봉투 앞뒷면에는 판매사의 이름, 취급 물감의 색상, 염료 대금의 지불 방식 등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봉투 앞면에는 판매사 선광양행鮮光洋行의 이름과 함께 ‘독일 염료 안료 직수입 도산매獨逸染料顔料直輸入都散賣’, ‘조선 색복 장려 협회 직영朝鮮色服獎勵協會直營’ 등의 문구가 보인다. 선광양행은 독일염료를 직수입하는 합자회사였다. 시중에 유통되던 염료 대부분을 독일의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당대에는 어떤 색상을 물들여 입었을까. 봉투에 기재된 색상만 하더라도 흑색, 회색, 양회색1) 등 무채색과 주홍색, 분홍, 자주, 꼭두선2) 등 붉은색, 황색, 고동색 등의 노란색, 반물3), 남색, 취월4), 보라 등의 푸른색, 유록, 연두, 옥색 등의 녹색, 무려 16종에 달한다. 이들 물감은 온수에 풀어 물을 들이거나, 검정, 꼭두선, 반물 등의 짙은 색상은 물감에 소금을 다량 혼합하여 물을 들인 후 냉수에 헹구어 말리는 방법으로 옷감을 염색했다.

물감 봉투 | 일제강점기 | 14.5×21.3cm

오랫동안 흰옷을 즐겨 입던 습속이 이렇듯 다채로운 색상으로 물들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봉투 뒷면에 기록된 선전서宣傳書를 통해 그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색의 착용의 명분을 선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한글로 적어 설명한 것이 눈에 띈다.
선전서에는 “우리의 진흥振興은 경제經濟가 제일이요, 경제를 하시려면 색의가 제일입니다. 생활개선을 하려면 백의白衣를 철폐하시고, 행복을 바라시면 가정에 염료染料를 상비常備합시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같은 시기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던 색의 선전의 기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주도 아래 생활개선 운동의 일환으로 절약을 내세운 색의 착용의 필요성이 선전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잡지와 신문을 통해 백의의 비경제성과 색의 전환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백의는 쉽게 오염되고 자주 세탁을 해야 하므로 비경제적이며, 세탁과 손질에 여성의 시간과 노동력이 소모된다고 비판하면서 색의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적인 시선에서 백의를 비효율적이며 비경제적인 것으로 본 것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색의 착용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지역마다 ‘색의 착용 촉진회’, ‘색의 장려 위원회’, ‘흥풍회興風會’ 등의 이름을 한 단체가 조직되어 색의 착용을 주도하고, 군수·면장 등의 명의로 백의 금지와 색의 착용 실시를 강제한 경고문警告文, 권고문勸告文, 권유문勸誘文 등 다양한 이름의 안내문이 앞다투어 내걸렸다.

선일양행의 돈표물감 봉투 | 일제강점기 | 5cmX7.5cm

덕세양행의 덕자표 물감 봉투 | 일제강점기 | 6.2cmX7.5cm


흰옷 착용을 금하는 조치들은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시장에서는 흰옷을 입은 사람의 옷에 물감을 뿌리거나, ‘색의장려’ 또는 ‘색의착용’이 새겨진 큰 도장을 찍기도 했다. 장날에는 면장과 면 직원들이 ‘흰옷 입은 사람은 하등下等 사람, 색옷 입은 사람은 상등上等 사람’이라는 글귀가 적힌 삐라를 돌리는 일도 있었다. 또한, 흰옷 입은 사람의 면사무소 등 관공서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얼굴에 먹칠하고, 색의를 입겠다는 서약서를 받기도 하고, 흰옷 입은 인부 채용을 거부하는 등의 제재가 관 차원에서 주도되었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조치에 대한 반감이 일기도 하였으나, 도리어 같은 시기 색의 보급을 달성한 각 지역의 모범 사례와 그 성과를 담은 신문기사가 곳곳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흰옷의 ‘색복화’는 물감의 보급과 함께 실천되고 있었다. 지역마다 공동염색소를 설치하거나 염색강습회를 개최하여 염색법을 알려주고 물감을 배포했다. 또한, 전국 곳곳에 염료특판점을 두어 판매하거나, 군·면 차원에서 염료를 대량 구매하여 면민에게 배급하고 대금을 수합하는 방식 등으로 유통하였다.


이 물감 봉투가 배포된 과정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봉투 뒷면의 규정서規定書에 따르면, 가정에서 사용한 물감의 양 만큼 대금을 봉투에 넣어두고, 수금할 때 대금과 더불어 사용하지 않은 물감을 반납하는 식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염료를 먼저 보급하고 후에 대금을 수금하는 방식으로 염료 유통의 활성을 꾀한 것이다. 아울러 봉투 하단에는 물감의 사용 명세를 기록하도록 사용한 물감의 색상별 수량, 가격, 합계를 기재하는 표가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만큼 염료 대금의 수금이 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4년 2월 14일 『동아일보』에는 면민이 빈곤하여 수금이 어려워지자, 한 독지가가 지역민의 대금을 전부 대불한 선행이 소개될 정도였다.

경고문(警告文) | 일제강점기 | 25×17.9cm 5)

권고문(勸告文) | 일제강점기 | 13.4×19cm 6)


흰옷의 금지와 색의의 장려는 우리의 전통적 관습을 벗겨내고, 식민지 조선을 경제적 효율성을 인식하는 근대 국가 국민으로 일원화하여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물감의 보급이라는 당시 상황을 통해 조선인 통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물감 봉투는 단순히 물감을 포장하고 보관하는 봉투의 기능을 넘어 당대 물감 소비의 시대적 특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 재의 빛깔과 같이 흰빛을 띤 검정색.
2) 덩굴풀 꼭두서니를 말한다. 꼭두서니에서 추출한 색소로 물을 들이면 매염제에 따라 보랏빛, 갈색빛, 노란빛을 내기도 한다지만, 주로 붉은 색을 내기 위해 쓰는 염료로 알려져 있다.
3) 일반적으로 ‘쪽빛’으로 알려진 검은빛을 띤 짙은 남색.
4) 남색과 비취색에 가까운 파르스름한 색.
5) 1938년(昭和 13) 9월 1일 예산군에서 발행된 경고문. 10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말일까지 모든 사람이 나이와 처지에 따라 염색하여 색의를 착용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6) 영일군(迎日郡)에서 발행된 권고문. 10월 1일부터 생활개선, 경제 및 활동력 증진 등의 이유로 흑의를 입고 백의를 폐지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글_서정현 |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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