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추석의 빨간 구두

빨간 구두 한 켤레만으로 가슴 설레고 한없이 행복할 수 있었던 유년 시절의 추석 이야기.

여동생이 카톡으로 보내준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잃어버린 이종사촌을 찾아 막 한숨 돌리고 있던 차에 사진사의 부추김으로 얼결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지금은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가 된 사진 속 주인공들도 신기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내가 신고 있는 빨간 구두였다. 앞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냈다.

4학년 가을 즈음에 할머니는 친척집 잔치에 갔다가 여동생의 구두를 사오셨다. 난생 처음으로 선물 받은 구두로 인해 여동생은 기뻐 어쩔 줄 몰랐지만, 나는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펑펑 울었다. 동생은 검정색 바탕에 앙증맞은 리본이 달린 그 구두를 장롱 속 깊이 모셔두고 한 달도 더 남은 추석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몰래 더 많이 신어 보았던 그 구두는 할머니께는 골칫거리였는지도 모른다. 이후로 나는 할머니만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댔고 할머니는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약속한 날, 할머니의 외출 보따리에서 나온 구두를 본 순간 나는 기쁨으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빨강 바탕에 구두코와 굽이 검정인 그 구두는 여동생의 것보다 훨씬 더 고급지고 예뻤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추석날 아침, 나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떨었고 떡 심부름을 자처했다. 떡이라야 전날에 온가족이 만든 송편이 전부였지만 나는 앞서가는 아버지와 남동생을 신나게 뒤따랐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역시 종갓집인 큰집이었다. 종손인 정헌 오빠는 모인 친척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 보이는 남자들 틈으로 여자들이 보였지만 그들은 상차림으로 분주했기 때문에 나는 떡만 간신히 전해주고 큰 집을 나와야 했다. 내 구두가 설 자리는 없었고 실망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집으로 갈 떡 심부름도 도맡았다. 내 빨간 구두를 누군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보 똥구이(원래 이름은 모름)나 술꾼 완이 오빠라도 좋았다. 아이들의 선망인 정규 오빠의 신기한 서울말도 그날은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

‘점빵’을 찾는 아줌마들의 종종걸음과 차례를 지내러 다니는 남자들과 음식을 나르는 색시들 그리고 놀러 나온 아이들로 골목은 어느 때보다 부산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내 구두에 집요하리만치 관심을 보인 사람은 ‘가다쟁이’ 경순 언니였다. 유니나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는 언니의 머리는 그날도 한 올 한 올 다리미로 다려놓은 듯 빛이 났다. 경순이 언니는 가족과 함께 신작로에 있는 산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갓 결혼한 경순 언니의 새언니는 핑크빛 고운 한복 차림으로도 흐트러짐 없이 성묘를 잘 마친 듯 보였다. 산 깊은 곳에 묘가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운 차림이어서 이다음에 크면 나도 도로변에 산소가 있는 집으로 시집가야지 싶었다. 내 맘에 드는 한복에 빨간 구두를 신고 사뿐히 걷는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옆집 선아가 이브껌 하나를 주며 내 구두를 신어보고 싶다고 했다. 구두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이브껌을 입에 넣었지만 아무리 씹어도 입술이 빨개지지는 않는 것을 보니 미영 언니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공장 간 대실댁 큰딸이 ‘짤순이’를 사 왔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이번 추석에는 순자 언니, 현숙 언니도 한일 짤순이로 추석 선물을 대신했다. 덕분에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장 간 민영 언니는 술주정뱅이 아비의 넋두리에 눈물을 쏙 빼야 했다. 언니와 친했지만 빨간 구두의 흐뭇함에 빠진 나는 언니의 억울한 기분을 맞춰주지는 못했다.

마을은 시내에서 돌아온 자식들로 친척들로 북적이고 그들의 이야기로 명절의 그득함이 있었다. 한가위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 저녁은 추석의 절정이었다. 동네 언니 오빠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그들만의 신호로 친구들을 모았고 그날에 예약된 한 사람의 집으로 죄다 몰려가 놀았다. 안방과 사랑방에서는 어른들의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텅 빈 건넌방에 친구와 동생들을 모아놓고 나는 공주놀이를 제안했다. 말도 안 되는 각본을 짜고 빨간 구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물론이다.

마침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쓰나미가 지나간 듯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래도 그해 추석은 빨간 구두로 허전함이 덜했던 것 같다. 내 짝꿍 유경이는 틀림없이 부러워할 빨간 구두로 인해 등굣길이 기다려졌기 때문이다. 4학년 추석과 함께 지금도 내 마음을 꽉 채워오는 추억 속의 내 빨간 구두.

글_정명옥 |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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