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인생, 인생 국수

더운 날과 추운 날, 축제의 현장과 애도의 현장, 언제 어디에서든 국수는 우리 일상과 함께 해 왔다.

‘국수’로 불리는 음식만큼 재료와 조리법의 다양성을 지닌 먹거리를 찾기는 힘들다. 어찌 보면 더없이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사연은 모양처럼 길기만 하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오늘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국수 1. 오묘한 이치를 지닌 국수 순산 비법

국수집 사장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깊게 숨을 들이켜 공기의 맛과 향을 음미한다. 뺨을 스치고 콧속을 파고드는 바람으로 온도와 습도를 가늠한다. 그리고 그날 반죽에 들어갈 물과 소금의 양을 결정한다. 국수는 이렇게 사람이 자연을 이해하고 그와 하나가 되어야 탄생할 수 있는 오묘함을 지녔다. 여름과 겨울이 다르고 장마와 건조한 날이 다른 비법이 발휘되어야 제대로 된 국수가 순산된다. 이런 순산의 비법을 오로지 세월과 경륜으로 터득하고 밀가루에 간잡이를 하는 고수들이 있어 우린 오늘도 제대로 된 국수를 만날 수 있다. 만인의 음식인 국수에 대한 그들만의 신념을 지켜오고 있는 비법 전수자들이 여전히 있는 것이 고맙다.

국수 2. 들녘보다 너른 국수의 힘

높은 기온과 습한 공기 때문에 장마철의 일상생활은 녹녹치가 않다. 아침 출근길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기상캐스터의 예보는 이러한 상황에 더 불씨를 당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즈음 농촌 들녘은 더위와 습도 덕에 눈코 뜰 새 없는 시절을 보낸다. 논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이 쑥쑥 자라는 만큼 돌보는 사람의 손길도 바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편하게 집에 앉아 제대로 된 밥상 앞에 앉는 것도 쉽지 않다. 또한 삼시 세끼만으로 고된 노동을 견디기 힘드니 자연스럽게 새참이 준비된다.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 두 번이 보통이면 이중 한번은 십중팔구 ‘국수’다. 그것도 가장 소박한 ‘잔치국수’.

요즘은 먹거리의 재료도 풍부하고 조리도구도 발달하여 진한 육수에 화려한 고명으로 멋을 낸 ‘잔치국수’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도 저도 없고 시간마저 없던 시절. 새참을 담은 소쿠리에는 삶아서 물기를 뺀 국수와 주전자에 담긴 보리차, 그리고 간장, 좀 더 챙겼다면 김치 정도가 전부였다. 불어터진 국수 한 덩이에 보리차를 붓고 간장(지역에 따라서는 설탕을 넣기도 한다)으로 간을 맞춰 후루룩 후루룩 들이킨다. ‘들이킨다’는 표현이 딱 맞게 국수는 흡입된다. 땡볕에서의 노고를 국수 가락처럼 집어삼키고 다시 힘을 얻는다. 눈앞에 펼쳐진 너른 들녘에 쏟아야 할 땀조차 국수는 잠시 잊게 만든다.

마늘밭새참-만들기 ⓒ 최지현

마늘밭새참-만들기 ⓒ 최지현

국수 3. 가장 순수한 국수의 고귀함

2002년 가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동의 한 종가 불천위제사를 참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다. 집, 제수, 제사 그리고 엄숙한 자리를 채워주는 어른들의 이야기… 이는 풍성함을 넘어선 행운이었다. 낮부터 집안의 이곳저곳은 조상에게 올릴 제수 준비로 모두가 여념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고정하게 만드는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국수’였다. 대청에 큰 나무판을 놓고 길이가 족히 1미터는 넘어 보이는 홍두깨로 반죽을 얇아지도록 펼치는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느껴졌다. 홍두깨에 감긴 반죽면을 야무진 힘으로 꾹꾹 누르면서 감고 펴기를 반복할 때마다 면은 넓어지고 얇아졌다. 사이사이 노란 콩가루가 뿌려진다. 상대방의 얼굴이 비칠 정도의 두께가 되자 차곡차곡 접어 가지런히 칼로 썰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1인분 정도씩을 일정한 간격으로 채반에 정렬한다. 콩가루를 입은 얇은 미색 국수의 자태는 이미 내 미각을 다 마비시켰던 거 같다.

제사를 마친 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눠먹을 것을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12시가 넘어 시작된 제사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맘은 점점 더 국수에게로 가고 있었다. 이른 저녁 간단하게 했던 요기는 새벽으로 가는 시간까지 버티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내 앞에도 정갈한 국수가 놓였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쓰신 어르신들도 이미 눈으로 국수에 매료된 느낌이었다. 그 당시의 배고픔은 어떤 맛의 음식이라도 그릇까지 먹을 수 기세였다. 젓가락에 걸쳐진 국수가 입안으로 들어갔다. 입에는 들어갔는데 씹어지지가 않는다. 내가 생각했던 맛이 아니었다. 난 아무런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주변 어른들의 표정을 살폈다. 모두 대만족이었다. ‘그래. 이 맛이지. 국수가 이래야지.’ 무슨 맛이란 말인가? 국수가 왜 이래야 하는 걸까? 맹물에 삶은 국수를 넣고 간장으로 살짝 간을 했던 국수. 난 그날 그 국수를 다 먹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 후로도 수백 그릇의 국수를 먹었을 것이다. 채 한 그릇도 비우지 못했던 그날 국수의 기억은 점점 더 또렸해져갔다. 예를 갖춰야 하는 귀한 자리에 더 없이 어울리던 그 순수한 국수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불천위 어른을 경배하고자 모인 분들의 마음과 닮았던 국수였다.

경사든 애사든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국수는 꼭 함께한다. 호불호의 언급조차 필요 없는 대중의 음식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재료와 함께해도 어우러짐을 만들어내니 속내가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국물을 붓고, 고명을 얹고, 때로는 벌겋게 비빔질을 해도 주인공은 역시 국수다.
더울 때, 추울 때, 기쁠 때, 슬플 때 그 어떤 상황에도 이렇게 어울릴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진 먹거리. 긴 길이만큼 잔향을 남기는 여유와 멋드러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이런 국수를 닮았으면 싶다.

글_박선주│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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