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

19세기 말, 육해공을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관문으로서 교통도시 인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가장 먼저 열린 항구는 부산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궁극적인 개항 목표는 사실상 인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천은 한성을 향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1883년 인천의 항구가 열렸다. 서소문에서 의주를 통해 중국과 연결되던 기존의 도로에서 인천과 한강, 용산의 만초천을 타고 한성까지 들어올 수 있는 뱃길이 새롭게 열리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다.

길의 변화는 세상을 바꾼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도 그 중 하나였다. 일본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의 문화는 인천항을 통해 물밀 듯 유입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의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인천 땅을 밟았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그는 서양식 숙박업소 대불호텔에서 묵을 수가 있었다. 그때 이미 인천은 일본 조계와 청국 조계 그리고 각국 공동 조계가 형성되며 국제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각국의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인천 거리를 장식했다. 그야말로 인천은 새로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가 뒤섞이는 용광로가 되었다.

철길, 인천과 한성을 잇다

인천의 항구가 열리며 자연스럽게 한성까지 이르는 길에 대한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강의 뱃길을 통해 한성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날씨와 조류의 여건을 살펴야 했기 때문에 수로에만 의지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인천에서 한성에 이르는 육로의 마역사들이 새로운 기능을 담당하기에는 그 규모와 배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교통시설 제안이 바로 철도 부설이었다.

최근 공개된 이상재의 『미국공사왕복수록』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1888년 이후 미국과 철도 부설에 대해 구체적 논의가 이루어져 이미 계약서 초안이 만들어졌다. 당시 철도 부설의 의미를 조선 정부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그로부터 알 수 있다. 1896년 조선은 경인선 부설권 허가를 미국 기업가 모스James R. Morse에게 내주고 인천에서 기공식이 성대하게 열었다. 이에 따라 경인선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결국 이듬해 5월 경인선 부설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인천항 전경이 인쇄된 우편엽서

월미도와 항구 풍경이 인쇄된 우편엽서

1899년 일본에 의해 경인선이 개통되며, 인천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도시 성장을 겪는다. 철도가 부설된 1900년을 기점으로 인구수부터 큰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1900년에서 1905년 사이 일본인의 증가는 300% 이상이었다. 1908년 4월 13일 통감부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한국철도선로안내를 통해 당시 인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데, 각종 관공서를 비롯해 상업회의소, 각종 회사, 금융기관, 병원, 공원과 함께 일본의 신사와 사찰 또한 각각 3개씩 세워졌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인천이 일본인들이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 도시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인천 앞바다를 등대가 밝히다

인천에서 한성까지 철도가 연결되며 그간 지지부진했던 등대 부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83년의 조일통상장정 제31관을 통해 ‘각 항구를 수리하고 등대나 초표를 설치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로부터 특별한 움직임이 없자,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등대 건축 전문가인 이시바시 아야히코에게 한국의 전 연안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를 근간으로 당시 총세무사였던 존 맥리브 브라운과 32개소 등대를 부설하기로 협의했다. 이후 1902년 3월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인천해관 등대국이 탄생했다. 우리나라 등대 부설이 본격화해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1902년 건설된 팔미도 등대 ⓒ김종헌

1902년 5월 16일부터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및 백암의 4개 등대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1903년 6월 1일 4개 등대는 점등을 시작했고, 이후 오랫동안 인천 앞바다의 뱃길을 밝히게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등대와 육로의 관계에 있다. 당시 새롭게 부설된 등대들은 모두 경인선이 있는 인천, 경부선이 있는 부산, 호남선이 있는 목포와 군산, 경원선이 있는 원산에 집중되었다. 결국 등대는 뱃길을 철도로 연결하는 점화기였던 것이다.

철길, 뱃길, 하늘길이 모인 관문 도시

1883년 인천 개항을 통한 일본 조계가 한국 침략을 위한 서곡이었다면, 경인선 부설은 서울로의 이동에 대한 편리성과 인천 거주의 안정성을 제공하는 계기였다. 일본과 원활하게 연결하기 위해 철로와 등대가 부설되었고, 이는 한국의 도시구조가 내륙 도시 중심에서 항구 도시 중심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자족적 도시구조에서 외국과의 연결이 모색되는 외부 지향적 도시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구조는 오늘날 국제도시 인천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74년 수도권전철 개통 기념 승차권

인천항 선거 건설 준공 기념우표

100여 년 전 인천이 일본의 의도에 의해 서울의 진입구 역할을 해왔던 피동적 도시였다면, 이제는 철길, 뱃길, 자동차길, 하늘길이 모여 있는 진취적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의 인천에는 대한민국의 인적, 물적, 자원이 모여 세계로 진출하는 적극적인 기세가 존재한다. 과거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 지금 한국의 모든 길은 인천을 통하고 있다. 인천의 이러한 가능성이 도시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지리적 역사에서 비롯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김종헌(배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위원)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03045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대표전화 02-3704-3114    팩스 02-3704-3113

발행인 윤성용    담당부서 섭외교육과  © 국립민속박물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