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배를 타고 전해진 상품, 박래품舶來品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박래품은 조선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요 몇 개월 사이, 우리 박물관 관람객들 가운데는 즐거운 나들이를 위해 특별히 고풍스런 느낌의 서양식 옷을 빌려 입고 서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이 입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개화기의 복식을 흉내 낸 것인데, 근래에 해당 시기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의 큰 인기를 얻은 것이 그 배경이 된 듯하다. 아마도 이렇듯 개화기 의상을 빌려 입고 박물관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은 자신이 영화나 드라마 속의 모던보이나 신여성이 된 듯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근대적인 산업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하던 개화기에, 그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이 입던 양복의 옷감, 주머니 속의 시계, 그리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채우던 많은 물건들은 어디서 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물건들은 대체로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바다 건너온 수입품들이었다.

1876년, 조선 조정이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청 및 유럽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서울과 인천 등에는 ‘양행洋行’이나 ‘상회商會’와 같은 이름을 한, 무역회사들이 세워졌다. 인천 제물포와 서울 회동에 지점을 개설한 독일계 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 Meyer & Co.이나, 마찬가지로 인천에 설립된 미국계의 타운센트 상회陀雲仙商會; Townsend Co.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외국의 여러 상품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조선의 산물을 수출하면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수입품들에 ‘박래품舶來品’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이는 말 그대로, ‘배에 실려 온 상품’이라는 뜻인데, 일제강점기 초기인 1920년 관세 인상과 관련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이에 대해 ‘모양 있고, 쓰기 좋고, 튼튼한, 서양 사람의 손으로 만든’ 상품이라 하면서 일본산 수입품들과 구분 짓고 있다. 다시 말해, 박래품은 ‘서양’에서 수입된, 갖고 싶을 만큼 좋은 특별한 상품들이었던 것이다.

초창기, 이들 ‘물 건너온’ 세련된 서양 상품의 상당수는 왕실이나 특별히 부유한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품이자, 자신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위세품威勢品이었다.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독일, 미국의 두 회사가 수도에서 영업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궁궐이나 정부를 상대로 직접 거래하고 있으며 (중략)포도주와 술을 공급한다. 이 상품들은 다행히도 대중에게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독한 술로 인해 한국 민중이 타락할 개연성은 없어 보인다.
–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 1894』 중에서

하지만 대중의 수요도 지속적으로 늘어서 1900년대 초에는 옷감을 염색하는 데 쓰이는 화학 염료, 영국 맨체스터 산 무명, 녹슬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고 알려졌던 바늘,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진통제 퀴닌키니네; Quinine 등, 대중의 일상 생활에 보다 긴요한 상품들이 대표적인 수입품으로 꼽혔다.

세창양행에서 수입한 바늘
말라리아에 특효로 알려졌던 진통제, 퀴닌
세창양행에서 수입한 염료의 상표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전해진 박래품들은 서양과 조선, 근대와 전근대라는 전선戰線을 형성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단순히 말하자면, 서양에 대한 동경과 세련된 공산품에 대한 욕망이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개항 이후 1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의 다이나믹한 변화를 이끈 한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글_최효찬│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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