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의 반세기 변천사

부자父子가 대를 이으며 자리를 지켜온 서울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의 변천사를 돌아보았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는 46년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진관이 있다. 아버지가 운영했던 ‘서울 사진관’을 아들이 함께하며 그 상호를 바꾼 ‘서울스튜디오&설담스튜디오’다.
아버지 나복균씨가 처음 사진사 일을 시작했던 1969년에는 사진을 찍는 일조차 생소했다. 가늘게 간 연필로 감은 눈은 뜨게 하고, 세필로 ‘백일 기념’ 글씨를 필름에 적었던 서울 사진관은 많은 사진관이 문을 닫았던 디지털카메라 시대를 버티고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가족사진을 찍었다. 사진관의 사진수정 도구가 연필에서 포토샵으로 변하는 동안 그 피사체인 가족들의 구성도 변했다.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변하고 1인 가구 또한 늘고 있는 현재, 가족사진을 통해 보는 가족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사진을 찍어온 부자에게 그들이 관찰한 가족사진 변천사를 들어보았다.

 

Q. 밖에 걸려있는 사진관의 옛날 모습을 보고 놀랐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하셨는데 몇 년부터 사진관을 시작했나?
나복균_1969년부터 사진 찍는 일을 시작했고 1973년 삼양동에서 서울 사진관을 열었다. 당시에는 총각이었고 몇 년 후 이 동네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딸 셋을 낳고 1980년에 막내아들 승보를 낳았다. 승보는 어려서부터 사진관에서 놀면서 지냈다.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건 중학생 때로 보조 기사 역할을 했다.
나승보_아버지가 이 정도 실력이면 야외 촬영도 가능하다고 하셔서 고등학생 때부터 웨딩 촬영을 다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1층 서울스튜디오에서 인물사진을 위주로, 나는 3층에서 가족사진, 웨딩 촬영 쪽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이어받았다기보다 오래전부터 함께였다고 말할 수 있다.

 

 

Q. 아버지의 권유로 사진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나승보_현장에서 배우다 보니 빛에 대한 감각이 남달라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인간 노출계’였다. 졸업 후 5년 정도 아버지를 떠나 신문기자로 일하기도 하고 다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적도 있는데 좀이 쑤시거나 몸이 아팠다. 후에 다시 아버지와 1층 사진관을 운영하다 2016년 3층을 확장했다. 아버지를 끌어안고 우는 꿈을 꿀 정도로 내 힘으로 사진관을 확장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아버지 생전에 그 꿈을 이뤄서 뿌듯하다.

 

Q. 과거에서 지금까지 가족사진은 어떻게 변화했나?
나복균_1970년대에만 해도 이렇게 사진관에 와서 가족사진을 찍는 개념이 없었다. 가족들이 다 모이는 게 쉽지 않으니 주로 명절이나 회갑, 칠순 같은 잔칫날 집에 와서 찍어달라고 하는 식이었다.
나승보_지금은 이동이 자유로워 무슨 날 모인 김에 찍지 않는다. 평균 촬영 인원도 예전에는 10명이었고 지금은 6명 이내다. 대가족은 과거 15명, 20명이 기본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방계가족까지 모인 대가족을 많이 찍는 편이다.

 

 

Q. 시대 변화에 따라 가족사진 스타일도 달라졌나?
나승보_예전에는 정장을 주로 입었다면 지금은 셔츠와 청바지를 많이 입는다. 과거에는 포즈도 경직되어 있었다. 지금도 부모님들은 자유로운 포즈가 익숙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웃는 건 잘 못하신다. 딸이 있는 집은 딸이 분위기를 풀어서 찍는데 아들이 많은 집은 여전히 굳어있는 편이다. 아버지가 구도를 정해주는 집도 있다. “너는 여기에 서고, 너는 저기에 앉아라.” 솔직히 말하면 가부장적인 집이냐 아니냐를 떠나 비용을 누가 내느냐에 따라 촬영을 주도하는 사람이 달라진다. 자녀가 돈을 내면 부모님은 “너희 좋을 대로 해라”라고 하신다.

 

Q. 보여주신 사진을 보니 과거와 현재의 구도가 확연히 다르다. 오른쪽이 좀 더 권위적인 느낌이다. 사진 구도가 가족 내 위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나승보_삼각형 구도가 전통적인 스타일이고, 지금은 이렇게 나란히 서서 편안하게 손을 잡고 찍는다. 그래서 인물 배열을 보면 그 사진관이 오래된 곳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방식으로 찍으면 지금 돈을 버는 사람을 뒤에 세운다. 아버지와 아들, 첫째 외에 아무도 그 자리에 못 섰다. 만약 딸이 많은 집이라면 큰딸과 사위처럼 그 집을 대표하는 자녀를 가장 뒤에 세웠다. 10명이 찍던, 20명이 찍던 이렇게 탑을 세우는 구도가 가장 안정적이고 보기 좋다. 배경지도 무게감 있는 서재 느낌에서 현대적인 회색으로 변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보여주고 선택하게 하는데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로 찍고 나서 가벼워 보인다고, 다시 옛날 스타일로 찍으려는 분들도 있다.

 

 

Q. 최근엔 반려동물도 함께 찍고 싶어 하는 분들이 늘지 않았나?
나승보_우리도 그런 요청을 많이 받는다. 반려동물 시장이 커지고 있어서 그에 맞게 변화를 추구하는 동료들도 많지만 나는 사람 중심으로 찍는 걸 좋아한다. 반려동물들의 습성을 모르고 촬영했다가 처음에 고생이 많았다. 스튜디오가 낯설다 보니 영역 표시부터 하더라. 며칠을 매달려 만든 배경지에 오줌을 싸는데 속이 많이 탔다. 이후부터는 촬영 조건을 제시하고 거기에 동의하면 진행한다. “강아지가 혀 내민다고 다시 찍지 않아요. 저희는 사람이 잘 나오는 것에 집중해서 촬영합니다. 촬영 공간에서는 계속 안고 계셔야 해요.” 이런 것이 조건이다.

 

Q. 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사진관을 운영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아시겠다.
나복균_내가 1992년부터 통장을 하다가 이후에 아내가 했고, 지금은 아들이 최연소 통장으로 일하고 있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 동네는 서쪽이 북한산 그린벨트로 개발이 묶여있어서 다른 서울 지역보다 변화 속도가 느리다. 살기 좋아서인지 오래전부터 계속 사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가 이곳에 있으니 타지에 나간 자녀들이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 사진관을 다시 찾는다. 내가 돌 사진을 찍어줬던 아이들이 결혼해 자기 아이 돌 사진을 찍으러 오기도 한다.

 

 

한국 가족사진의 5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사진관 실내

 

Q. 얼마 전 출연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아버지가 직접 쓰신 백일 기념글씨가 인상적이었다.
나복균_옛날에는 포토샵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사가 가는 붓으로 필름에 ‘백일 기념’, ‘첫돌 기념’과 날짜 등을 직접 썼다. 그래서 사진사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글씨를 잘 쓰는 것이었다.
나승보_백일에는 한자로 ‘백일 기념’만 적고 첫돌에는 한글로 ‘첫돌 기념’과 날짜를 적는 게 전통 방식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글씨를 쓰시면 내가 포토샵으로 합성한다.

 

Q. 가족사진을 찍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가족사진을 찍고 싶은가?
나복균_사람들은 대개 가족계획이 끝났을 때와 아들의 입대 전, 자녀들이 출가하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는다. 어떤 부대에서는 가족사진을 관물대에 붙이게 한다고 들었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가족사진을 보며 위로를 얻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가족사진 찍자고 오랫동안 말만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손님을 본 적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다.
나승보_나는 가족사진이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집에 멋진 그림을 많이 거는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을 걸지 않나? 우리는 가족사진 할인권을 여러 제품에 끼워 배포하고 가격이 싼 만큼 대충 찍는 사진사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는 말씀인데 그런 방식은 ‘함정’이다. 가족사진의 수준을 낮춤으로서 사람들의 기대를 흐리고, 사진관 업계를 흐리는 행동이다. 지금도 아버지와 나는 10시 촬영이라고 하면 아침 7시부터 장비를 세팅하고 여러 상황을 미리 연습해본다. 사람들이 집에 걸어둔 가족사진을 볼 때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작품처럼 찍어야 한다는 것이 내 주관이다.

 

 

인터뷰_편집팀
사진과 영상_김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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