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밥꽃을 피우다

가마솥 뚜껑을 젖히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 전통 부엌에서는 탐스러운 밥꽃이 피어났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롭게 내 속으로 들어온 것이 있으니 그건 ‘봄’이다. 젊은 시절엔 가을, 겨울이 그렇게 좋았다. 반팔 셔츠에 겉옷 하나로 이겨내는 맹추위에 가슴이 뿌듯했고, 숨을 쉬면 콧속이 딱딱 얼어붙는 그 느낌을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니 봄이 오는 것은 내 인생의 또 한 페이지가 접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올봄 유난히 차례차례 피어나는 꽃에 눈이 갔다. 작은 꽃망울에서 시작하여 꽃으로 또 잎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색이 새롭게 다가왔다. 인공 물감을 풀어 비슷한 색을 옆에 놓으면 왠지 촌스럽고 억지스러운 것 같은데, 자연의 꽃 색깔은 유치한 원색을 하고 있어도 고왔다. 그들을 보고 냄새 맡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기쁨을 주는 봄에게 감사했다. 매년 비슷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주었을 텐데 이제야 내가 알아본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봄과 함께 실컷 즐기고 있을 때 내 머릿속으로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 느낌 – 그래, 이와 아주 유사한 행복의 맛을 본 적이 있는데 – 이 있어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답을 찾았다. 바로 ‘부엌’이었다. 부엌에서 새로운 맛의 세상을 만난 많은 사람들은 내가 받은 느낌에 공감할 것이다. 어떠한 상상을 하든 그 이상의 것이 부엌에 있었다. 자 이제 그곳으로 가보자!

 

‘동이 틀 하늘에 채 붉은 기운이 돌기도 전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정지로 들어선다. 아궁이를 한번 살피시고 가마솥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한다. 남아 있는 불씨 위에 장작을 올리고 화력을 살려줄 갈비를 한 움큼 짚어 얹는다. 아침밥을 짓기 위해서다. 흰쌀은 언감생심… 가마솥은 거뭇거뭇한 보리와 강낭콩, 감자 등으로 채워진다.

 

감자붕생이밥
감자붕생이밥
감자붕생이밥

 

묵직하게 덮여 있는 가마솥 뚜껑을 밀치고 밥물이 몽글몽글 흘러내린다. ‘상그랑’ 소리를 내며 뚜껑을 부뚜막 한쪽으로 젖히자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어머니는 세월의 연륜이 묻은 나무 주걱으로 밥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피어오르는 김처럼 하얀 쌀밥은 아니지만 사랑과 정성 가득한 아침거리다. 그릇마다 소복소복 담아본다. 화려한 색은 아니지만 마치 갓 피어난 꽃처럼 탐스럽다. 이렇게 부엌에서 피어난 밥꽃으로 가족들은 따뜻한 한 끼의 행복을 함께 나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 날들에 대부분의 우리네 부엌 풍경은 이랬다. 오래된 집을 만나러 찾아다니는 것이 나의 일이었던 시절, 운 좋게도 이런 장면을 많이 만났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풍경들. 부엌만 쫓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안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녀를 따라 발걸음이 자연스레 부엌으로 이어졌다. 대화가 중간에 끊어지지 않도록 뒤꽁무니에 졸졸 붙어 다녔다. 대청에 앉으면 이 집 사람들이 대청에서 무엇을 하는지, 안방에 들어서면 안방은 또 어떻게 쓰이는지, 부엌 문지방을 넘으면 부엌 이야기로 연결이 되었다.

 

그곳에서 고추 당추 보다 더 맵다는 시집살이의 복받치는 설움을 매운 아궁이 연기로 인해 흐르는 눈물에 섞어 풀었고, 빠듯한 살림에도 가족들을 위해 따신 밥을 준비했고, 때론 부뚜막에 앉아 식은 밥으로 항상 굶주린 허기를 급하게 채우기도 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살강에 올려놓은 투박한 사기그릇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 아궁이 반대편 찬광에 쟁여놓은 저장음식의 비법, 천장 다락에 숨겨 놓고 마시던 밀주…몇날며칠을 펼쳐도 다 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부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안주인과의 대화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다. 여기저기 배어 있는 음식 내음에 허기가 슬슬 밀려왔다. 먹다 뚜껑을 덮어둔 먹거리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염치 불구하고 간단한 식사를 청했다. 더운밥을 해주시겠다는걸 어렵게 사양했다. 벽에 걸려있던 작은 소반을 내려 투박하지만 속 깊은 한상을 차려주셨다. 흙으로 다져진 바닥에 작은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소중한 음식을 맞이했다. 가마솥에서 금방 피어난 이팝나무 꽃처럼 하얀 밥꽃은 아니지만 난 아직도 그 한 끼를 잊을 수가 없다. 안주인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에서 시간으로 쌓인 관록과 새벽 우물에서 처음 길어 올린 정한수 같은 맑은 마음이 담겼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삶이 녹아온 ‘부엌’이기에 가능했다.

 

한국기행-남도의 맛, 가마솥 밥 ⓒ한국교육방송공사

 

밥꽃이 전자레인지에서 피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눈물 콧물 쏙 빠지게 매운 연기를 내뿜는 아궁이 앞에 앉아 가마솥 안에서 밥꽃이 피기를 기다리던 시절이 잊히지 않았으면 싶다.

 

오늘도 시골 어느 집 부엌 아궁이에서는 맛깔난 밥꽃이 피고 있을 것이다.

 

 

글_박선주│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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