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의 부엌에는 이야기가 있다

1776년(영조 52년) 류이주가 세운 남도의 대표 고택,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만난 종가의 부엌 이야기.

문화류씨의 종가이자 남도를 대표하는 고택, 전남 구례 운조루雲鳥樓에는 지난 250년 가까이 이곳을 지켜 온 뒤주가 있다. 이 집의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이 뒤주는 수백 년 동안 지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명문가의 품격을 조용히 말해주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어서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문구가 적힌 뒤주는 쌀이 세가마나 들어갈 만큼 큰 덩치를 가졌다. 근방에 배곯는 이가 없도록 하되, 또한 주인을 만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도 쌀을 퍼갈 수 있는 위치에 놓은 그 배려의 마음이 아름답다. 배려의 품격이 넘치는 뒤주의 전설을 간직한 종가의 며느리 곽영숙 씨가 들려주는 선조들의 철학과 그 중심이 되었던 집안의 부엌 문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막내 며느리로서 운조루에 들어와 집을 지키고 있다.

곽영숙_회사에서 남편10대손 류정수을 만나 1996년 연애 결혼했다. 처음엔 고향이기도 한 진주에서 신접살림을 하다가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시어머니를 놔둘 수 없어 본가에 들어왔다.
2003년 봄의 일이다.

 

현재 운조루의 전통 부엌은 겨울이나 장마철에 아궁이에 불을 때는 정도로만 사용한다

 

Q. 다른 지역에서, 도시에서 사시다가 종가로 시집오면서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집 청소하다가 길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곽영숙_그건 약간의 과장이다(웃음). 하지만 정말 힘들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가 지금은 60여 칸이 남아있는데 여전히 매우 큰 집이다. 청소뿐만 아니라 많은 것이 낯설고 버거웠다. 시골 명문가의 며느리란 ‘명예’보단 ‘멍에’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남편과 함께한 지 어느덧 16년이 흘렀다.

 

Q. ‘운조루하면 소나무 뒤주가 유명하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나눔과 베품의 철학이 느껴진다.

곽영숙_조상님의 숭고한 나눔의 뜻이 담겨있는 ‘가보’다. 오래도록 원래의 뜻대로 ‘나눔의 쌀독’ 역할을 하다가 일제강점기 때 그 역할이 멈췄다. 일본 사람들이 공출로 다 뺏어가니 그대로 두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쌀독을 채워두면 계속 뺏어갔으니까.

 

 

Q. 쌀독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면면히 내려오는 부엌 문화가 있었을텐데 처음 시집왔을 때 부엌 풍경은 어땠나?

곽영숙_솔직히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웃음). 살림이나 음식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던 도시의 직장인이었으니까. 다만 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방이 여러 개니까 자연히 부엌도 많았다. 우선 방에 불을 때야 하니까 아궁이가 필요하지 않나. 한 부엌에 솥이 3개가 있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식초병. 막걸리 식초인데 주둥이를 솔잎으로 막아놓은 모양이 근사했다. 그리고 정화수가 있었다. 여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인 부엌이나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비는 것 말이다.

 

Q. 그때와 지금의 부엌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나?

곽영숙_많이 변했다. 사실은 몇 년 전에 공사를 했는데 업자들이 실수로 아궁이를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그래서 옛날의 쩍쩍 갈라진 흙벽의 예스러운 멋이 사라졌다. 남편 말이 어머니의 솥밥과 누룽지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지금 부엌은 겨울에 방을 데우거나 장마철에 습기를 제거하려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정도로만 쓴다. 주방은 따로 마련했다.

 

 

Q. 류씨 종가댁에만 내려오는 전통 음식이 있을 것 같다.

곽영숙_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우리 집안은 명문가이긴 하지만 부잣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석꾼도 아니었고. 논이 만 마지기면 만석꾼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백 마지기 정도였다. 게다가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고, 뒤주 이야기처럼 항상 나누고 살았기 때문에 정작 집안 어른들은 늘 배고팠다고 한다. 조상들 일기를 보면 얼마나 가난했는지가 잘 나온다.

 

Q. 일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나?

곽영숙_남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보릿고개 시절, 큰 솥에 향교에서 얻어 온 쌀과 소나무 껍질을 벗겨 넣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또 한번은 붓장수가 와서 평소처럼 먹이고 재운 뒤 그이의 붓을 사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 샀다고 한다. 그만큼 가난했다.

 

‘타닥타닥’ 마른 나뭇가지 타는 소리와 매캐한 연기가 오랜만에 운조루 부엌을 채웠다

 

Q. 나누고 사느라 정작 운조루 사람들은 굶고 산 셈이다.

곽영숙_어머님이 한국전쟁 중에 시집을 오셨는데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음식을 달라는 통에 하루 종일 밥을 했지만 정작 당신은 멸치 하나를 못 잡쉈다고 하시더라. 그러니 양반가의 호화로운 음식 문화 같은 건 생각하기 힘들었다. 다만 명절이면 유과를 만들어 먹었는데 콩을 가득 넣은 콩 유과와 고춧가루를 넣은 붉은 빛깔 고추 유과가 맛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머니도 팔순이 훌쩍 넘으셨고 할 사람이 없다.

 

Q. 그렇게 잊혀진 음식들이 많이 있겠다.

곽영숙_여느 집안처럼 막걸리도 만들어 먹었다고 하는데 1960년대 막걸리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단절되었다고 한다. 녹두로 누룩을 만들어서 아주 깔끔하고 맛있었다고 한다. 제사는 지내야 하니까 한동안은 몰래 만들어서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곤 했단다.

 

전남 구례 운조루의 장독대

 

Q. 장독대에 옹기가 많이 있더라.

곽영숙_어머니가 노쇠하셔서 예전처럼 음식은 못 하셔도 장에 대한 고집이 있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지 않나. 실제로 아버님 돌아가시던 해에 장맛이 이상했다고 하더라. 지금도 간장과 된장, 고추장은 꼭 직접 만들어 먹는다.

 

Q. 훗날 운조루를 지켜나갈 후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곽영숙_힘든 일이니 강요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고맙게도 지키겠다고 한다면 남편이 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것. 그리고 나보다는 주위를 좀 돌아보라는 것. 우리 조상들이 넉넉하게 살지는 못했어도 그런 철학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운조루가 이어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인터뷰_편집팀
사진과 영상_김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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