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하고 음반도 변하고

기술이 진보하면서 새로운 음반이 나오고 새로운 음반은 그 시대의 음악 감상 행위를 바꿔놓았다.

현대 사회에서 음악은 공기와 같다.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연결해준다. 데이터 파일로 저장해도 무게는 0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베토벤 운명 교향곡 유성기 음반(4장 앨범)은 무게가 2kg이나 되었고, 포터블 유성기는 7kg정도였다. 그만해도 들고 다니면서 들을 만했다.

 

소리를 기록하는 데 처음 성공한 사람은 프랑스의 에듀아르 레옹 스콧 드 마르텡벨Édouard-Léon Scott de Martinville, 1817-1879이다. 그는 나팔통으로 소리를 모으고 얇은 고막에 침을 붙여 소리의 진동을 먹지에 새겼다. 소리의 파동을 그래프로 그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것을 재생할 수는 없었다.

소리의 파동을 재생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이다. 그는 먹지 대신에 은박지를 사용해 소리를 새긴 다음 다시 돌려서 역으로 떨림판을 진동시켜 재생에 성공하였다. 1877년은 녹음된 소리를 처음으로 재생한 해다. 그러나 은박지는 한 번만 사용하면 찢어졌으므로 실용성은 없었고, 녹음과 재생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돈을 받는 정도였다.

 

축음기와 원통형 실린더

 

녹음을 실용화시킨 사람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다. 1885년 그는 은박지 대신 천연 왁스인 오조케라이트ozokerite로 실린더를 만들어 소리를 기록했다. 이 실린더는 여러 번 재생이 가능했고, 녹음 시간도 2~3분이나 되었다. 이 소식에 ‘열을 받은’ 에디슨은 성능이 더 좋은 합성 왁스로 실린더를 만들고, 소리를 잘 재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1888에 만든 에디슨 유성기는 즉석에서 녹음이 가능하고, 여러 번 들어도 닳지 않았으며, 회전 속도가 일정해서 마침내 상품성을 갖게 되었다. 에디슨은 이 기계를 개량해서 나팔과 태엽을 달았다. 편리하고 튼튼한 에디슨의 유성기는 현장에서 녹음과 재생이 가능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녹음기로 사용되었다. 이 실린더 방식을 서양에서는 포노그래프phonograph라고 한다.

 

1899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와서 소리를 들려주고 돈을 받던 ‘유성기집’에서 쓰던 것도 이런 실린더 방식의 유성기였다. 서울에는 명창 광대의 소리를 넣고, 이것을 들려주는 유성기집이 여러 곳 영업했다. 그러나 이 왁스 실린더 역시 2~30번 재생하면 닳아서 소리가 잘 나지 않기 때문에 표면을 깎아버리고 다시 사용했다. 나중에는 얇아져서 부서져 버렸다. 왁스 실린더는 양초보다 조금 더 단단한 정도였으므로 개화기에 우리나라에서 녹음된 것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축음기와 음반

 

둥글넓적한 평원반 레코드를 처음 만든 사람은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 1851-1929였다. 그는 실린더의 종파수직진동 녹음의 특허를 피하기 위해 평원반에다 횡파수평진동로 기록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즉 왁스 평원반에 소리골을 새기고 여기에 도금을 하여 금형틀을 만든 다음 단단한 셀룰로이드로 찍어내는 방식을 고안했다. 만들기는 좀 복잡하지만, 금형으로 찍어내면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단단해서 여러 번 틀어도 상하지 않았다. 엘드리지 존슨Eldridge R. Johnson, 1867-1945은 이것을 개량하여 셸락shellac을 사용하여 잡음도 없고 음질도 빼어난 음반을 만들었다. 그는 음반의 표준을 만들고, 빅터victor 레코드를 세우면서 우승을 선언했다. 이 베를리너 방식을 보통 그라모폰gramophone이라고 한다. 평원반은 마침내 에디슨의 실린더를 꺾고 음반 시장을 재패하였고, 에디슨 실린더 음반은 1929년 문을 닫고 말았다.

 

베를리너 방식의 평원반은 매우 우수하게 개량되었지만, 금형으로 찍어내므로 개인이 직접 음반을 만들 수는 없다. 그 대신 공장에서 유명한 가수들이 녹음한 음반을 만들어서 팔았으므로 이때부터 음반은 전형적인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평원반이 처음 취입된 것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6년이고, 실제 시판은 1907년부터였다. 1906년 상반기에 일본 삼광당-콜럼비아에서 악공 한인오와 관기 최홍매를 오사카로 초청하여 평원반 30장을 취입하였고, 가을에는 미국 빅터 레코드에서 직접 서울에 와서 음반 100장을 취입하였다. 1911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음반회사들이 우리 음반을 제작하였는데, 나팔통식 녹음 시절에는 일본축음기상회(닙보노홍)와 일동축음기(제비표 조선레코드)에서 음반을 제작하였다.

 

‘노래가락’이 녹음된 SP 음반

 

마이크로폰을 사용하는 전기 녹음은 1925년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우리나라 음반은 1928년부터 적용되었는데, 그때부터는 콜럼비아, 빅터, 포리돌, 시에론, 오케, 태평 등 6대 음반회사와 몇몇 군소 회사에서 한국 음반을 제작하였다. 1945년 이전에 나온 한국음악 음반은 약 6,500종 정도가 되지만 모두 일본에서 제작했다. 광복 후에 유성기 음반은 1960년대 후반까지 생산되었는데 킹스타, 신세기 등 여러 회사들이 있었다. 유성기 음반은 본래 쇠바늘을 쓰는 유성기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고, 1분간 회전수는 78회전이었다.

 

1959년부터는 새로운 형식인 LP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LP는 1분간 회전수가 33⅓이고, 재질은 비닐이다. 가볍고 탄성이 좋아 부서지지 않는 대신 강도가 약해서 상처가 나기 쉽다. 회전이 느리고 소리골이 매우 미세하여 한 면에 20~30분 정도까지 녹음할 수 있으나 정전기가 심해서 그냥 방치해두면 먼지를 끌어들여 잡음이 심해진다. 그래서 LP 음반은 부지런히 닦아가며 애지중지 다루었다. LP 음반 시절에도 포터블 전축이 있어 1970년대에는 야외로 전축(야전)을 들고 소풍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보통은 실내에서 듣기 때문에 성능이 좋은 오디오를 장만하는 것이 꿈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마란츠나 매킨토시 같은 미제 오디오까지는 아니더라도 파이오니어나 산스이 같은 일제 오디오만 해도 일반 가정에서는 그림의 떡이었다. 더구나 녹음이 가능한 릴 테이프를 갖춘 집은 거의 없었다.

 

LP 음반이 놓여있는 전축

 

1970년대에 별표 전축이나 인켈 오디오에서 음향기기를 생산하면서부터 국산 오디오가 일반화되었으며,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곁들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동네 전파사에서 듣고 싶은 곡만 골라 카세트테이프로 복사해주는 일도 유행했다. 택시는 승객을 위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주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지만, 8트랙 테이프를 틀어주는 택시도 있었는데, 무한반복 되므로 테이프를 갈기 귀찮은 운전자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1979년 일본 소니에서는 휴대용 녹음기인 워크맨walkman을 개발하여 대히트를 하였다. 워크맨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1980년대 젊은이들의 표상이었고, 혁신의 대명사였다. 이때부터 개인적인 녹음이 일상화되었고, 공연장 무대 앞에 녹음기를 올려놓는 일도 흔한 풍경이었다. 지금은 당장 쫓겨날 일이다.

 

워크맨
콤팩트디스크(CD)
휴대용 CD플레이어

 

1982년 네덜란드 필립스와 일본 소니가 공동으로 개발한 CD는 음향을 디지털 신호로 기록하는 매체다. 이를 계기로 녹음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다른 세상으로 옮아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부터 CD 음반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컴퓨터 산업의 발달과 함께 모든 음악은 이제 디지털 데이터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음반에 대한 물적 ․ 공간적 개념이 사라지고 음악 역시 데이터 개념으로 변했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음반을 사서 소유했지만, 이제는 접속에 대한 비용을 지불한다. 거실을 장식하던 멋진 오디오로 최고급 음향을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대는 저물고, 품질보다는 접속의 편리성을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CD도 사라져가고 고급 오디오도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참 편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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