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머무는 상자, 유성기

소리를 머물게 하는 유성기는 음악을 재생하기 시작하면서 인류 문명에 빼놓을 수 없는 문물로 자리 잡았다.

 서양에서 발명된 유성기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이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1832~1903를 통해서라고 전한다. 물론 오페르트 이전에 유성기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1880년에 프랑스 신부를 통해 유성기가 소개된 일화가 전하는데 당시 유성기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상자에서 사람의 소리가 난다 하여 “귀신의 소리”라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성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나 유성기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시절만 하더라도 유성기는 음악을 저장하고 재생하는 장치가 아니라 단지 소리가 나는 아주 신기한 물건이었다.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도 자신이 만든 유성기에 ‘말하는 기계’라는 뜻으로 ‘토킹 머신Talking Machine’이란 이름을 붙였으니 말이다.

 

원통형디스크
에디슨 축음기

 

음악을 재생하면서 큰 인기를 얻다

‘소리가 머무는 기계’라는 뜻의 유성기는 소리를 녹음하고 다시 들을 수 있는 장치다. ‘소리를 쌓는 기계’라는 뜻으로 축음기라고도 불렀다. 단지 신기한 물건이었던 유성기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음악을 듣는 용도로 활용되면서부터다. 대량으로 음반을 제작해 판매하는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유성기가 음악을 듣는 장치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성기가 소개될 당시 명창 박춘재가 고종황제 앞에서 유성기에 노래를 녹음해 즉석에서 들려주기도 하였고, 188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빅터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 라디오방송국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이제 라디오와 유성기를 통해 음악이란 장르를 대중적으로 즐기기 시작하게 된다.

 

빅터 레코드

 

동서양을 막론하고 라디오와 유성기가 생기기 이전 시대에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대단히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음악을 실연하는 현장에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음악가를 초빙하지도 않고 공연 현장에도 가지 않으면서 내 집 안에서 내 마음대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당시 음악 애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실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다만 라디오 수신기나 유성기의 가격이 상당한 높았다는 점이 약간의 걸림돌이었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 프로듀서가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하는데 본인 월급의 2~3개월 치를 지불했다고 하니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유성기가 나름 대중화되었던 1930년대 유성기 광고를 보면 가격이 대략 30원~100원 정도였다. 이 당시 교사 월급이 약 50원 정도였으니 유성기 역시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성기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고 대략 30만대 이상이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유성기의 폭발적인 인기는 주로 노래 덕분이었으며 특히 유행가의 성장이 여기에 큰 몫을 차지했다.

 

국내 최초 생산 진공관 라디오
축음기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는 비난도

유성기처럼 신기하고 재미있는 기계가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대중매체를 통한 유행가가 성행하면서 당시 젊은이들이 유성기로 유행가를 주로 듣게 되었는데 그 가사 내용이 좋지 않다고 하여 유행가를 ‘전염병’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유성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해서 유성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생겨났다. 당시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수신기는 매월 수신료를 지불해야 했고 다시 듣기가 불가능한 단점이 있었지만 유성기는 다시 듣기가 가능하여 유행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유행가의 인기와 함께 유성기를 포함한 음반 산업이 대호황을 맞게 되자 일제는 1933년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를 공포하여 음반의 제조 및 판매 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 규칙은 이른바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주로 유행가들이 금지 대상이었다. 이 당시 소위 ’풍속괴란‘ 명목으로 금지된 곡들은 춘향전 자진사랑가, 서도민요 사설난봉가 등의 전통음악과 연애행진곡, 전화일기 등의 대중가요 등 주로 가사 내용이 사랑과 연애를 다룬 것들이었다. 사랑과 연애 감정을 다룬 곡들의 경우 비록 발매가 되더라도 공공장소 등에서 오후 5시 이전에는 감상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 신문에서는 이런 세간의 유행에 대해 ‘유행가 범람시대’란 표현으로 세태를 풍자했다. 신문물이 물밀 듯 유입되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거리를 활보하는 시대였지만 동시에 여전히 전통의 위엄이 버젓이 살아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로얄토킹머신

인류가 처음으로 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유성기를 발명해 낸 것이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이 신기한 물건은 불과 몇십 년 만에 생활문화의 일부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이 물건을 사랑과 연애의 감정을 재생하고 공감하는 장치로 이용하는데 동의했던 듯하다. 음악의 개념 중 하나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시간 예술’이다. 그리고 유성기는 이 시간 예술이 머무는 상자였다.

 

 

글_위철│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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