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은 놀림의 예술이다

붓이 우리 생활에서 떠나간 오늘날에도 여전히 붓과 함께 살아가는 캘리그래퍼 강병인의 붓에 대한 생각

초등학교 6학년 때 취미로 양봉을 하는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글깨나 읽는 사람들이 다 그랬듯 그분도 글씨를 좋아해서 방과 후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유혹의 매개체는 꿀이었다. 그 달달한 꿀 생각에 여러 친구들이 멋모르고 서예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낙서 좋아하는 화가 지망생에, 어려서 이사를 많이 다녀 안정감이 필요했던 나에게 붓글씨가 딱 맞았다. 마침내 혼자 즐길 수 있는 게 생겼다는 게 좋았다. 열심히 하다 보니 실력도 괜찮았는지 학교 대표로 군 단위 붓글씨 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칭찬을 받으니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했다.

 

그 후 계속 붓을 잡고 살다가 글씨 예술가, 캘리그래퍼가 되었으니 수십 년 동안 붓과 함께 산 셈이다. 붓은 나의 애인이다. 나에게 사랑이자 평화다. 물론 무섭기도 하다.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금방 나를 싫어한다. 붓과 잘 교감해야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있다. 이 둥글고 도톰한 물건을 손에 쥐고 글씨를 쓸 때 내 온몸의 신경은 손끝으로 간다.

 

화각붓華角筆, 붓보, 그리고 붓함

 

좋은 붓은 이 살아있어야 한다

동아시아 붓글씨 문화권 선비에게 지필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만드는 재료가 한정적인 지, 묵과 비교하면 필은 그 재료가 무궁무진하다. 수많은 동물의 털이 다듬어지고 나무통에 끼워진 채 선비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양털을 비롯해 족제비털, 소털, 말털, 맷돼지털, 닭털 등등. 여기에 대나무와 칡뿌리까지, 가는 털로 가공할 수만 있다면 나무와 식물의 뿌리까지도 붓으로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 갓난아이의 부드러운 배냇머리로 붓을 만들기도 했다(어른의 머리카락은 탄력이 없어 세워지지 않으니 붓을 만들 수 없다).

이 털 중에 가장 곧고 긴 털을 골라내 만든 붓이 가장 비싸고 좋은 것이 된다. 인류 최초의 붓은 신석기 시대 지금의 중국 땅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만 년도 넘는 세월동안 얼마나 다양한 붓이 수많은 선비들의 손을 거쳐 갔을까?

 

탄력이 있어야 원하는 대로 획이 그어진다. 자고로 좋은 붓은 붓끝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최고로 친 것은 쥐 수염으로 만든 붓이었다. 쥐 수염 붓은 육지에 사는 쥐의 수염으로 만든 것과 바다의 나무 배에 사는 쥐의 수염으로 만든 것, 두 종류로 나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육지 쥐에 비해 나무 배에 갇혀 사는 쥐는 선원의 움직임이나 파도 소리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했고, 그때마다 수염이 바짝 섰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해 수염의 탄력이 좋다고 한다. 농담 아닌 농담이지만 왠지 그럴 듯하다. 조금 비싸고 귀하긴 하지만 지금도 시중에서 쥐 수염 붓을 살 수 있으니, 전설로만 남은 붓은 아니다.

 

필통과 붓걸이

 

쥐 수염 붓을 선호한 것은 서예가뿐만이 아니다. 회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치 사진처럼 인물의 피부와 표정, 눈동자, 옷깃의 주름 등을 세밀하게 표현한 조선 후기 회화에서 바다 쥐의 수염으로 만든 붓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면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 얼굴의 주름, 수염 한 올 한 올까지 생생하게 묘사해 조선시대 자화상의 최고 수작으로 손꼽히는 윤두서 「자화상」 속의 수염도 쥐 수염 붓이 있기에 가능했다. 가늘고 탄력이 좋으며 튼튼하기까지 해서 선이 일정한 굵기로 그어지고 먹도 오래 머금었으니 선비의 긴 수염을 표현하는 데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득획을 꿈꾸며

좋은 획은 붓끝이 살아 있을 때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붓의 털, 모필도 바로 그 끝이 얼마나 잘 살아 있느냐, 탄력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화가들은 붓으로 선을 긋는다 하고, 서예가는 획을 긋는다고 말한다. 그 획을 말할 때 신, 기, 근, 골, 육, 혈을 빌려 표현한다. 올바른 정신을 바탕으로 튼튼한 뼈를 받치는 힘 있는 근육과 맑은 피, 너무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몸과 같아야 한다는 것. 좋은 ‘획’은 이 모든 것의 총화이고, 이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바로 붓이다. 장인이 연장 탓을 하면 안 된다지만, 결국 좋은 붓은 좋은 글씨로 갈 수 있는 길이다. 때문에 먹과 벼루도 중요하지만 붓은 좋은 글씨를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으로 통했다.

 

문방구함_붓, 먹, 벼루 등의 문방구를 보관하는 휴대용 상자

 

‘열 개의 벼루가 구멍 나고, 천 자루의 붓이 몽당 붓이 됐다.’ 추사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분에게 천 자루는 너무 적은 것 같다. 아마 만 자루 이상 아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왕희지나 김정희 같은 대가를 한번만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어떻게 앉아서 어떻게 붓을 쥐고 어떤 표정으로 글씨를 썼을지 너무 궁금하다. 좋은 붓을 잘 다뤄서 좋은 글씨를 쓰는 일은, 평생을 해왔지만 여전히 너무나 어렵다.

 

붓은 어렵지만 붓이 있어서 내가 즐겁고, 붓이 있어서 내가 글씨를 쓰고, 붓이 있어서 오늘도 내가 살아간다. 글씨를 쓰는 일, 그리고 붓은 나의 희망이고 꿈이다. 소리하는 이들이 득음을 꿈꾸듯 나는 오늘도 ‘득획’을 꿈꾼다.

 

 

구술_강병인(캘리그래퍼)

정리_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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