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만 부채를 쓰나?

손에서 바람을 만드는 기능으로 따지면 부채는 휴대용 선풍기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선풍기가 대체할 수 없는 부채의 역할은 꽤 많다.

여름이다. 부채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동그란 물체를 코앞에 들이대고 다니는 이들 뿐이다. USB 충전 휴대용 선풍기다. 더위를 쫒고 햇살도 가리기 위해 쓰는 부채는 이제 없다. 그래도 혹시, 설마, 쓰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겠지 생각했다. 쓸데없는 기대라는 걸 알았다. 몇 년 전까지 ‘얍삽한’ 디자인의 싸구려 접부채를 길거리에서 팔던 기억이 난다. 주유소나 동네 마트에선 개업 기념으로 광고용 원형부채를 거저 주기도 했다. 이런 풍경조차 아스라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나부터 부채를 쓰지 않는다. 집 안에선 선풍기와 에어컨이 돌아가므로 쓸 일이 없다. 바깥도 사정은 비슷하다. 오가는 전철의 실내는 집보다 더 시원하다. 상가와 일터에선 과도한 냉방으로 긴팔 옷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다. 시골의 노인들은 어떠한지 유심히 봤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더위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버지조차 부채를 부치지 않는다. 정작 땀 흘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손엔 부채를 쥘 여분이 없다. 더위에 맞서는 부채의 기능이란 이미 상실되었고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전통이 되어버렸다.

 

설경도雪景圖, 청전靑田 이상범 作

접부채

 

내게 접부채에 글을 써 보내주는 서예가가 한 분 있다. 매년 받은 부채를 모아 세어보니 열 개가 넘었다. 인연의 세월은 그 보다 훨씬 더 길다. 좋은 글귀를 채운 부채의 전달식도 중요하다. 향 좋은 술 한 병과 기름진 안주가 곁들여져야 제격이다. 말과 글이 겉돌지 않는 서예가의 인품과 글씨가 점점 일치한다는 걸 느꼈다. 단아한 서법의 깊이가 모든 걸 보여준다.

 

글씨가 지닌 예술성이란 건 새삼 떠들 이유도 없다. 글씨가 써진 재료도 중요하다. 비슷하게 보이는 종이라도 그 품질과 결의 차이는 큰 폭으로 벌어질 게 분명하다. 재료가 붙어있는 모양과 형식에서도 느낌이 달라진다. 액자나 표구 처리한 서예의 느낌은 누구나 안다. 벽면에 붙은 전시물이 되면 작품과 보는 눈의 거리는 멀어진다.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는 한 떨어져 봐야 한다. 글씨의 세부보다 전체의 인상이 먼저 다가오게 된다.

 

 

부채에 쓰인 글씨가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글씨와 눈의 거리가 가까워진데서 오는 변화다. 획과 삐침의 강약이 자세히 보인다. 글 쓸 때의 상태와 마음까지 읽어낼 듯했다. 글씨는 접으면 보이지 않는다. 좌르륵 하고 소리를 내며 펼쳐지는 순간 나타나는 형태가 있다. 쥐고 흔 들며 바람을 내면 글씨 또한 너풀거린다.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글씨의 신선한 조형성에 빠져들게 한다.

 

부채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물건이었다. 손에 쥐고 접고 펼쳐보는 동안 바뀌는 형태와 기능의 극적인 변신이 한 몸체에서 이뤄진다는 이유다. 마치 마술 같았다. 장면이 바뀌는 연극 무대가 손 안에서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과거 선비들이 부채를 주고받았던 이유를 알 듯했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는 은근한 메시지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재미없고 단조로운 일상을 부채놀이로 깨부수려 했던 거다. 아니더라도 시비 걸지 말기 바란다. 부채를 가지고 놀아본 내 생각일 뿐이니까.

 

 

여름의 필수품이었을 노인의 부채, 기산 김준근의 「낭반광댜모양」 모사복원품

 

부채는 상징이다. 나와 밖을 연결하고 차단시키는. 세월이 바뀌어도 판소리 소리꾼의 손에 부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소리하는 친구에게 술자리에서 소리 한 판 걸지게 부르길 청했다. 친구는 소리를 마다했다. 분위기 망칠 친구가 아니란 걸 모두 안다. 나중에 조용히 물어봤다. 부채가 없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손에 들린 부채로 분위기를 가다듬거나 제 얼굴을 가려 노래의 숨을 고른다는 것이다. 손에 쥐고 접으며 감정 전달의 소품 역할까지 하는 중요한 도구가 없으니 소리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거다. 소리꾼에게 좋은 접부채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바이올린만큼 중요한 악기였다.

 

예전 전주에서 만들어진 최고급 접부채를 본 적 있다. 소뼈로 장식한 손잡이의 정교함도 훌륭했다. 대나무 표면을 붙인 부채살의 부채는 기름을 바른 듯 매끈하게 펼쳐진다. 손맛의 끝판 왕이 이럴 것이다. 이를 아는 예인들이 즐겨 썼다. 부채 장인은 마지막까지 우리 소리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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