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다문화 국가였을까?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북방인들의 귀순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 초등학교는 올 1학년 신입생들의 잇따른 전출로 속병을 앓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떠난 이유는 이 학교에 다문화가정 학생들이 많다는 것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는 다른 다문화 학생들이 채우고 있어서 이 학교의 1학년 가운데 다문화 학생 비율은 지난 3월 50%에서 10월엔 80%로 치솟았다고 한다. 이들 학교의 학생 전출률이 왜 높을까? 그것은 한국인 부모들이 ‘다문화 학생이 많은 학교는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거나 자녀의 안전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레 걱정하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다문화란, 한 국가나 한 사회 속에 다른 인종·민족·계급 등 여러 집단이 지닌 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사회를 뜻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들은 우리와 피부와 머리색이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른 다문화가정, 곧 외국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에 대해 경계심을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이 단일민족으로서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외국에서 다른 민족들이 들어오느냐는 경계심일 것이다.

 

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북방인들의 내조來朝 이어져

 

그러나 우리민족은 원래부터 단일민족, 단일문화는 아니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단군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한 민족, 같은 동포, 곧 같이 피를 나눈 민족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우리는 단일민족은 아니었고, 한 울타리 안에 들어와 살면서 단일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저절로 갖게 되었을 뿐이다.

역사를 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부터 갈라져 나왔는데 그 출발점은 오늘날의 북만주, 흑룡강성 일대였다고 보이고 다시 거기서 백제가 나왔으므로 두 나라는 같은 민족으로 보이지만 신라는 다르다. 원래는 경주 부근의 6촌이 그 출발점이라고는 하지만 경주를 지칭하는 고대어 ‘셔블’이라는 말이 오늘날의 서울과 같은 것에서 보면 서울을 거쳐 이동한 민족으로 보인다. 게다가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 김춘추金春秋, 604∼661는 그의 비석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흉노의 휴도왕이라고 밝히고 있어 흉노계열일 가능성이 높고, 다른 연구에 의하면 법흥왕法興王, 미상~540은 선비족 모용 씨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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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비족 문화는 그들이 사용한 청동 솥이나 금속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중국 북방 유목민족의 흔적이 농후하므로 흉노나 선비족이 이동해 온 흔적이 점점 나오고 있다. 신라의 경우나 가야의 경우나 당시 전쟁에 의해 중국이나 만주에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거나 이동한 것으로 보이기에, 서로 다른 민족들이 당시에도 한 울타리에서 산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어떤가? 고려를 건국한 왕건 자체가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집안의 후손일 것이라는 연구가 있는데다가 건국 이후에는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여진족, 거란족, 몽고족이 차례로 고려로 망명을 해와 자리를 잡고 살았다. 이를테면 지금부터 꼭 1000년 전을 뚝 잘라서 들어가 보면 서기 1017년은 고려왕국의 8대 왕 현종顯宗, 992~1031이 즉위한 지 8년차를 맞는 해로서 북방의 거란족에 의해 많은 압박을 받을 때였다. 6년 전 거란의 1차 침입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현종은 막강한 무신의 권한을 축소하고 문신을 발탁하며 나라의 힘을 되살리고 있었다. 이때에 북방에 살던 여진인과 거란인의 내조來朝, 곧 귀순이 잇달았다.

여진 말갈靺鞨의 목사木史가 부락을 거느리고 귀순한 것이 시작이다. 현종은 이들에게 작위를 주고 이어 의물을 내려 주었다. 또 거란의 매슬買瑟·다을多乙·정신鄭新 등 14명이 와서 의탁했다. 동여진의 개다불盖多弗 등 4명이 와서 의탁하고 변경에서 공을 세워 바치겠다고 청하니, 허락하고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흑수말갈黑水靺鞨 아리불阿離弗 등 6명이 와서 의탁하니 강남의 주·현에 나누어 살게 했으며, 9월에는 거란의 군기곤기群其昆伎와 여진의 고저孤這 등 10호가 와서 의탁했다.

이후 북방인의 내조는 점점 늘어난다. 13년 뒤인 현종 21년 “거란의 수군水軍 지휘사로 호기위虎騎尉의 벼슬을 가진 대도大道 이경李卿 등 6명이 내투來投·귀화했다. 이때부터 거란과 발해인이 귀화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고 ‘고려사’는 기록한다. 그 전 해에 발해의 후예인 대연림大延琳이 거란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세운 게 도화선이 됐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가 건국1115년되는 12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족 주민이 고려에 귀화한다. 여진과 말갈만이 아니라 중국의 송나라에서도 주민이 많이 고려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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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대장경. 거란족은 고려를 침입하면서 귀순하기도 했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 건국 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가장 많이 귀화한 주민은 발해계로서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귀화했다. 전체 귀화인 가운데 73%를 차지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결과다. 그 다음으로 많은 귀화인은 여진계 주민으로 4만4226명에 달한다. 거란계 주민은 1432명이 귀화했다. 이들은 거란의 피정복민으로 억압을 받아오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나자 거란의 내분을 틈타 고려에 귀화했던 것이다. 한인漢人 귀화인은 송나라는 물론, 송나라 건국 이전의 오월·후주 등 오대 국가의 주민이 포함돼 있다. 모두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한 ‘송사宋史’의 기록에 근거할 때 결코 적지 않은 비율인 8.5%를 차지한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조선시대에도 우리 국경 밖에 살던 여진인들의 귀화가 많았다. 태조 이성계를 도운 여진인 이지란퉁두란이 대표적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의 장수인 사가야김충선가 일본군을 이끌고 우리 족으로 투항해 살기도 했다.

 

다양한 문화와 풍습 유입은
새로운 사회체제 변화 계기

 

이처럼 고려가 다양한 종족·국가 주민의 귀화를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 역사의 특징으로 거론돼 온 단일민족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유사 이래 동일한 혈족血族이 이 땅에서 동일한 문화를 지니고 공동의 운명체로서 반 만 년 동안 함께 생활해 왔다고 믿는다. 그런데 고려의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가 같은 피를 가진 단일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단일민족의 중요한 기준을 피의 순수성으로 본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주관적이다. 또 다른 기준인 지역과 문화의 동질성도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도 외래문화를 수용‧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된다. 변화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족이 고려 왕조에 귀화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 고려에 유입돼 새로운 문화, 사회체제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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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귀화하여 태조 이성계를 도운 여진인 이지란 _출처 경기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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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 장군으로 본명은 사야가다. 귀화 후 본관을 김해로 삼았다 _출처 달성한일우호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고려 후반기에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누구의 후손인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에서 밝혔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목전에 둔 한 말의 지식인들이 이승휴에게서 우리가 단군의 후손이기에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을 추출해서 근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1000년 전 우리는 이미 단일민족이 아닌 다문화국가였다. 21세기의 우리는 더 이상 다른 나라에 종속된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지구가 하나가 되고 수많은 인종과 언어가 교차하는 21세기라는 이 시대에 단일민족의 기준인 동일한 핏줄, 동일한 문화, 동일한 땅은 고정불변이 아니라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민족관을 가져야 할까? 또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동포, 아시아 각국의 이민자, 이웃 일본으로부터 귀화하는 사람을 어떻게 포용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영등포의 한 초등학교의 예는 다문화가정에 대해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민족이 다르면 문화는 다르지만,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특색과 차이의 문제일 것이다. 민족이라는 울타리나 테두리로 구획하고 경계할 일이 아니고 우리 땅에 들어와 같이 살면 곧 같은 국민, 같은 민족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으로 함께 안아주고 정을 나누면서 살 일이다. 우리 땅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나 가야의 유민들도 거기서 정착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 비록 우리에게 아픈 역사를 강요했지만, 그들도 민족을 넘어선 이웃으로서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밖에 없는 때일 것이다.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을 떨쳐버리고 세계는 하나라는 더 큰 생각에서 우리와 함께 살려고 하는 모든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여 그들과, 그들의 문화와 함께 멋진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닐까 한다.

글_이동식│언론인‧역사저술가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7년 KBS에 입사해 30년 동안 방송기자로 뛴 언론인. KBS에서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국제부장, 문화교육과학팀장, 취재 편집주간, 보도제작국장, 방송문화연구소장, 부산총국장, 해설위원실장을 거쳐 정책기획본부장을 지냈다. 1980년대 문화전문기자로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백남준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했다. 이우환, 이응로와 윤이상 등 예술가들을 조명했고, 현재 집필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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