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바버숍’. 최근 늘어나고 있는, 고품격 서비스를 내세운 ‘이발소’의 다른 이름이다. 깨끗하고 널찍한 공간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이발과 면도 외에 세분화된 기능성 화장품과 아로마 요법, 보석 요법 등을 동원한 최신식 피부 관리에다 고급 양주까지 서비스하는, 남성 전용 외모관리·힐링 공간이라고 한다. 한번 이용에 몇 만~몇 십만 원이 드는 이용업소다.

서민들로선 일상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이런 이발소가 유행하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욜로 족’이 뜨는 시대이고, 남성 고객을 미용실에 빼앗겨 온 이발소 처지에서 차별화된 고객 유치 전략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니 그렇다. 다만, 영어 이름 간판을 달아야 더 멋스럽고 더 전문성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건 좀 아쉽다. 멋으로 쳐도 전문성으로 쳐도 바버숍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서민 남성들의 저렴한 일상 재충전 공간 ‘이발소’가 살아 있으니 말이다. 많이 사라지긴 했어도, 여전히 몇 십 년씩 한 자리에서 수많은 단골을 거느리며 이발의 달인, 면도의 장인으로 성가聲價를 누려온 이발소가 전국 대·소도시 골목마다 남아 있다.

 

단발령 선포 후부터 1980년대 전까지
이어졌던 이발소 전성시대

 

이발소理髮所는 이용원·이용센터·이용소·이발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모두 ‘머리와 얼굴을 다듬고 정리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발소는 동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남성들이 한두 달에 한 번씩 들러 멋 내고 기분 전환하는 공간이자, 동네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오고가던 휴게실이었다. 유럽에선 이발과 간단한 외과수술을 겸하는 병원의 형태로 이발소가 발달해왔다지만, 우리나라에선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 없었고 이발소 개념도 없었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에는 ‘머리카락은 몸과 함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 해서 함부로 자르지 않는 유교 이념에 따라 남녀노소가 머리를 길렀다. 성인이 된 남성은 상투를 틀었다. 남성이 머리를 짧게 깎게 된 것은 1895년 단발령 선포 이후다. 이때부터 서구식 이발이 도입돼 이발소가 생기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돌아온 학생 등을 통해 짧게 깎는 머리 스타일이 국내에 확산됐다.

1980년대 이발소 모습 _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누구나 학교를 다니며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됐고, 상투를 고집하던 어르신들도 줄어들면서 이발소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50년대엔 남성 이용사 일색이던 이발업계에 정식으로 자격증을 딴 여성 이용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이발소가 급증하면서 고객을 끌기 위해 여성 면도사를 따로 두는 이발소가 늘어나며 인기를 끌었다. 서구 문화 유입 확산과 함께 남성 머리 스타일도 다양해지는 가운데 1980년대까지 이발소 전성시대를 누렸다. 1980년대 이후 이발소들은 학생 두발 자유화 조처로 학생 이용객이 준 데다, 미용실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는 남성이 크게 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기에다 80~90년대에 크게 유행한 이른바 퇴폐 이발소들은 남성 멋내기 장소로서의 이발소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밀실을 만들어놓고 ‘유사 성행위’나 성매매를 하는 퇴폐 이발소들이 도시 유흥가 뒷골목에 생겨나 이발소 회전간판을 달고 영업을 했다.

퇴폐 이발소의 성행은 ‘모범 이발소’를 낳았다. ‘모범택시’도 그렇지만 ‘모범 이발소’가 생긴 것은, 모범이 안 되는 문제 업소가 많아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이발업에 종사하는 보통 이발소가 모범 이발소다. 지금도 전국 이발소 중에 ‘모범 업소’란 표시를 한 이발소가 남아 있는 것은, 퇴폐 이발소도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모범이든 퇴폐든 빨강·파랑·하양 3색 회전간판사인볼을 쓰는 것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이발소를 상징하는 원통형 회전간판은 왜 3색일까?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 흰색은 붕대를 뜻한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이발사가 외과의사 일을 겸했던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간단한 외과 수술을 하는 곳이란 표지가 3색 간판이다. 이런 원통형 3색 간판은 1540년 프랑스 파리의 한 이발사 겸 외과의사가 고안했다고 한다.

 

사라져가는 이발소,
그러나 추억은 현재 진행형

 

한국이용사협회 등의 자료에 따르면 전통 이발소는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1999년 2만7000여 곳에 이르던 전국 이발소 수가 2016년 말 현재 2만300곳으로 줄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성들 대부분이 여전히 정기적으로 어디선가 이발을 한다고 볼 때 많은 수는 아니다. 이발소 이용객이 미용실 등으로 이동한 데 따른 감소일 것이다. 이발기구·재료상도 감소했다. 대표적인 이·미용 기구 상가인 서울 을지로5가 중부시장엔 1990년대 말까지 7곳의 이발기구·재료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3곳뿐이다. 4곳이던 이발의자 전문 생산업체도 1곳만 남았고, 이발소 회전간판 공장도 5곳에서 1곳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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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발소는 줄었어도, ‘오래된 이발소의 추억’은 현재 진행형이다. 소박하고 정겨운 옛 이발소 분위기를 간직한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용실이나 바버숍을 이용하는 젊은 층이 보기에는 고리타분하고 지저분한 ‘구닥다리 이발소’이겠다. 하지만 40대 이후의 많은 남성들에게는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으로 드나들어 온, 애틋한 ‘추억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먼저 반기는 훈훈한 연탄난로의 온기, 은은한 비누 냄새와 나른한 라디오 뉴스 또는 유행가 노랫소리, 차례를 기다리며 집어 들던 낡은 만화책과 야한 표지의 주간지들, 그리고 둘러보면 어김없이 벽을 장식하고 있던 돼지 가족 그림이나 밀레의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뒷목에 차갑게 닿던 바리캉과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 난로 연통에 살짝 문질러 따뜻하게 만든 거품솔이 목덜미에 와 닿는 느낌 같은 것들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발·면도를 마치고 타일 세발대세면대 앞에 앉으면, 대기하던 종업원이 조리에 물 가득 담아 한 손에 들고 뿌리며 머리를 감겨준다. 조리에 담긴 물은 물론, 난로 위의 양동이나 커다란 주전자에서 끓고 있던 물과 찬물을 반쯤씩 섞은 것이다. 그리고 세수를 할 때면, 종업원은 까슬까슬하게 마른 낡은 수건 한 장을 뒷주머니에 꾹 찔러 넣어주는 것이다.

이용자들에겐 추억의 공간이 되고, 이발사들에겐 자부심 넘치는 장인이 몇 십 년간 갈고 닦아온 기술을 펼쳐 보이는 장소가 된다. 오랜 단골을 거느리며 이발소들이 곳곳에서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이다.

 

기술과 자부심으로 이어온
오래된 이발소들

 

옛날식 이발관으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공덕동 성우이용원은 1927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3대째 대를 이어 영업 중인 이발소다. 곧 쓰러질 듯 낡고 빛바랜 이발소 건물은 서울시에서 ‘미래 유산’으로 지정해 보전하고 있다. 이발 경력 47년인 주인 이남열(69)씨는 140년 되고, 100년 된 독일제 쌍둥이표 면도칼들, 57년 된 바리캉, 54년 된 가위 등을 할아버지·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이발을 처음 배울 때부터 쓰고 있다는 닳아빠진 빗도 그대로다. 이 씨는 특히 솎아내기 가위질 솜씨가 뛰어난데, 이발 기술과 이발소 분위기에 반해 유명 기업인, 정치인들도 많이들 찾아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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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새이용원의 이덕훈(82)씨는 1958년 이용사 면허 자격을 딴, 우리나라 ‘첫 여성 이발사’로 알려져 있다. 이발 경력 64년의 이 할머니는 이발사였던 아버지한테서 19살 때부터 이발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요즘엔 비좁은 공간에서 단 1개의 이발의자로 손님을 받고 있지만, 수많은 어르신들을 단골로 거느린 이발사로서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각 지역 도시마다 이렇게 기술과 자부심으로 수십 년을 버텨오는 전통의 ‘모범 이발소’들이 수두룩하다. 주변 가까운 곳에 남아 있는 오래된 이발소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 싫다면, 오랜만에 시원하게 앞면도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코털과 솜털까지 사각사각, 긴장감 속에 귓불과 목덜미가 달아오르도록 사각사각, 졸음이 쏟아질 때까지 사각사각…, 시원하고 후련하게 밀고 다듬어 줄 것이다.

 

글_ 이병학│한겨레신문 선임기자
<한겨레> 여행전문 기자. 풍경 속에 사람살이의 일상이 깃든 따뜻한 여행지를 찾아다닌다. 살아 있는 자연, 숲과 나무들, 오래된 것들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 도시 여행> <여행, 박물관 빼놓고는 상상하지 마라> <대한민국 마을 여행> <놓치고 싶지 않은 우리땅 참맛> 등이 있다.

3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사진도 글도 어린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어린아이들 머리를 다듬을 때는 의자 양 팔걸리에 빨래판을 얹고 그 위에 앉혔었지요.
    참으로 그립고 정겨운 시절입니다. 이렇듯 따뜻한 글로 잊고 지내던 추억을 떠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할 뿐이네요..

  2. 이발소의 향수도 있지만 미장원에서 머리자르는것과 정말 천지차이라는것
    개인적인 느낌에는 이발소가 더 좋은듯
    서민들 입장에서는 가격이나 서비스 면에서 이발소보다는 미장원을 선호하게 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코리아나호텔에는 작은 입간판이지만 이발기능장이 운영하는 가게를 소개하고 있으니 이런쪽으로도 연관해서 글이 나오면 어떨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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