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해외여행을 했을까? ①

표류되거나 외교사절단으로 가거나

고려시대 전반까지만 해도 예성강 벽란도를 중심으로 서해를 통해 송나라, 원나라와의 민간 무역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명이 건국되면서 실시한 해상활동 금지 정책인 ‘해금海禁’과 왜구들의 잦은 출몰로 인해 고려 말부터 조선 말기까지 해상은 물론 국경에서도 주변국과의 사적인 왕래가 금지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뜻밖의 사고로 표류된 조선인들,
불운을 여행이라는 행운으로 보상 받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외국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악천후로 바다에 표류하여 일본이나 중국 연안에 표착하거나 외교 사절로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된 경우로 제한되었다. 먼저 표류로 외국에 간 대표적 사례는 최부1454~1504를 들 수 있다. 그는 1488년 추쇄경차관으로 노비를 체포하기 위해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나주로 향한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 영파에 표착하였다.

 

최부 일행은 해적에게 약탈당하고 왜구로 오해받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 홍치제를 알현하고 압록강을 건너 6개월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양에 도착한 최부에게 성종은 그의 표류부터 귀국까지 여정을 일기로 기록하여 바칠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최부의 『표해록』이다. 그로부터 329년 뒤인 1818년 4월 최두찬이 제주도에서 올라오던 중 16일 동안 표류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에 닿아 6개월여 만에 귀국하는 과정을 기록한 『승사록』이 전한다.

표해록, 최부 _출처 고려대학교도서관

 

조선인 중 표류로 인해 가장 멀리까지 해외로 여행한 인물은 바로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이다. 그는 전라도 신안의 우이도에 살던 상인으로 1801년 12월 홍어를 실어 나르던 중 눈보라로 인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그는 먼저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9개월 만에 북경으로 향하는 유구국 사신들과 함께 출선했으나 또다시 풍랑으로 표착한 곳이 여송국지금의 필리핀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던 여송국에서 8개월을 지내면서 중국 소주지역 상인들을 만나 광동 마카오로 이동했다. 이어 남경에서 대륙을 종단하여 북경에서 조선 동지사 일행을 만나 1804년 표류한 지 3년여 만에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순득은 1801년 제주에서 난파당한 여송국인들이 언어가 통하지 않아 조선과 청 양국 사이를 오가며 고초를 겪을 때, 여송국의 방언으로 통역하여 1809년 표류인들의 본국 송환을 극적으로 돕기도 했다. 이러한 문순득의 『표해시말』은 당시 전라도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을 통해 기록으로 전하게 되었다. 이렇듯 표류에 의한 해외여행은 뜻밖의 사고에 의해 본국으로 쇄환되는 과정에서 겪은 낯선 체험이었기 때문에 불운을 여행이라는 ‘행운’으로 보상받은 셈이었다.

공식적으로 해외여행이 가능했던
유일한 방법 ‘외교사절’

 

해금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던 조선에서 공식적 방법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외교사절로, 중국에 파견된 연행燕行과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행通信使行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연행’이란 명칭은 북경의 위치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땅이었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사절단의 일행으로 중국을 왕래한 기록을 ‘연행록’이라 통칭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파견된 각 사행마다 그 목적에 따른 공식 명칭이 있었다. 앞서 문순득이 북경에서 만났던 동지사행도 조선에서 매년 동지에 즈음하여 중국 황제에게 새해를 진하進賀하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한 정기 사행이다. 양국 간의 외교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파견하던 사은 ․ 진하 ․ 주청 ․ 진위사행 등 별행別行까지 감안하면 1년에 많게는 네 차례 이상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연행도, 북경 조양문 앞을 지나는 조선사절,
1784년 이후 _출처 숭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북경으로 가는 연행 사절단은 정사, 부사, 서장관 등 삼사를 비롯하여 통역을 담당한 사역원의 역관들, 삼사를 호위하는 군관, 문서를 담당한 사자관, 도화서 출신의 화원 외에도 이들의 말을 관리하거나 짐 등을 수발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역을 목적으로 사절단을 따라 중국을 왕래하는 상인 등 수백 명이 대규모로 이동하였다. 사절단 행렬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개성, 평양, 황주, 정주, 의주 등 관서지역을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넌 후 구련성, 심양, 광녕, 산해관, 영평부, 무녕현, 풍윤현, 옥전현, 계주, 통주를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다.

조선 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하면 내성의 남문인 정양문 내에 위치한 관소에 머물렀다. 동지사행의 경우 북경에서 체류하는 기간은 약 40일 정도로, 그해 동지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 이후까지 삼사를 비롯한 당상 역관 등 사절단의 핵심 멤버는 자금성에서 펼쳐지는 각국 사절단들과의 외교 의례와 북경의 황제 어원御苑인 원명원에서 황제가 배석한 연회 및 공연에 참가하였다. 이때 조선사절과 함께 외교 행사에 참석한 유구국오키나와, 안남국베트남, 섬라국태국, 면전국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국가 사절과 몽고, 회회국아라비아, 러시아, 네덜란드 등 여러 국적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이수광1563~1628의 경우 1594년 성절사행의 서장관, 1606년 진위사행의 정사, 1611년 동지 겸 주청사행의 부사로 무려 세 차례나 북경에 다녀왔다. 그가 저술한 지봉유설 권2 「제국부」 외국조에는 중국을 왕래하던 국가의 자연환경, 역사와 문화, 종교, 풍속 등의 정보를 기록하였는데, 북경에서 외국사절과 교류하면서 수집한 정보가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세계와의 소통 통해
조선사회의 성장 동력 제공

 

사절단의 구성원 중 삼사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던 자제군관은 삼사의 형제나 아들, 친인척 중에서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공식적 행사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다. 때문에 관소 밖 북경의 명소와 유적을 찾아 구경하였다. 조선사절단이 북경에서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공자묘와 그 옆에 세워진 국자감 같은 유학의 성지였고, 유리창 거리와 주요 사원에서 열리는 시장인 묘시廟市를 찾아 오래된 기물器物과 온갖 희귀한 서책 및 서화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17세기 전반부터 서구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에 들어오면서 세워진 천주당을 방문하였다. 천주교 남당은 조선사절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의 선교사들은 천문역법에 해박하여 중국의 관상대를 주관하던 고위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사절이 남당을 방문하면 한문으로 번역한 각종 자연과학서, 천문 역서曆書, 세계 지도를 얻거나 천문 관측기구 등을 구경할 수 있었고, 교당의 벽에 걸거나 그린 서양의 종교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천주당은 조선사절이 서유럽 각국의 선교사들과 직접 대화하면서 서구 문물의 이해를 넓히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글로벌 도시로서 북경을 방문한 조선사절은 세계 문물을 조선에 소개하였고 새로 입수한 견문을 바탕으로 북학사상과 실학을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18세기 후반 이후 북경에 다녀왔던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김정희 등은 연행 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국인들과 서신을 왕래하면서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적 발전을 견인하였다.

열하행궁전도, 승덕 열하의 피서산장 전경, 19세기 _출처 미국의회도서관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진하사행에 참여한 박지원은 청 황제의 여름행궁인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의 열하까지 이동하였다. 건륭제의 70세, 80세 생일은 북경 자금성이 아닌 피서산장에서 축하행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으로 약 250m 거리로, 1780년 8월 9일 열하에 도착한 박지원 일행은 열하의 국자감에서 8월 14일까지 6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박지원 일행은 티베트에서 초대된 6세 판첸라마Lobsang Palden Yeshe·1738~1780를 건륭제의 배석 하에 라마교 사찰에서 만날 수 있었다. 때문에 열하일기에는 다른 연행록과는 달리 북경에서 열하로 이동하고 열하에서 다시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경험을 기록한 것이 이색적으로 소개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 표류와 외교 사행은 해금 정책으로 폐쇄된 조선과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의 새로운 발전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유입시키는 주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글_정은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전남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朝鮮時代 明淸 使行 關聯 繪畵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 대외관계 기록화 및 회화식 고지도를 연구하며, 한국고지도연구학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에도시대 나가사키 당관唐館을 통해 유입된 중국화풍의 영향』, 『중국 역대 직공도의 한인도상韓人圖像과 그 인식』, 『19세기 대청사행對淸使行과 연행도』, 『중국에서 유입된 지도의 조선적 변용』, 『계미1763 통신사행의 화원 활동 연구』, 『조선시대 사행기록화』, 『조선 지식인, 중국을 거닐다』와 공저로 『전근대 서울에 온 외국인들』, 『표암 강세황』, 『조선 후기 문인화가의 표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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