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공휴일이 있었을까?

자신만의 사적 시간의 리듬

‘휴일休日’은 일상적인 노동을 중지하는 휴식의 날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일하지만, 나 홀로 휴식을 취하는 ‘사적인 휴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공휴일公休日’이란 ‘공’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이 모두 자신의 노동을 중지하는 공식적인 휴일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법률 제정을 통해 사람들의 ‘휴식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관공서의 공휴일 규정’2013.5.을 보면 공휴일은 ①일요일, ②국경일 중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③1월 1일, ④설날 전날, 설날, 설날 다음날음력 12월 말일, 1월 1일, 2일, ⑤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⑥ 5월 5일어린이날, ⑦ 6월 6일현충일, ⑧ 추석 전날, 추석, 추석 다음날음력 8월 14일, 15일, 16일, ⑨ 12월 25일기독탄신일이 있으며, 그 외에 공직선거법 제34조에 따른 임기 만료에 의한 선거일, 기타 정부에서 수시 지정하는 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공서 공휴일은 기본적으로 평균 일요일 52일, 국가의 여러 기념일 6일, 종교적 기념일 2일, 음력 속절 6일, 양력 속절 1일을 포함해 총 67일 정도로 추산된다. 주5일 근무제로 인한 토요일 휴무는 근로기준법 제50조근로시간의 “1주 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탄력적으로 운영되기에 공휴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노동과 휴식이 갖는 일상적인 리듬이 관공서의 공휴일 규정을 반드시 따르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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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아집도, 어느 사대부집 후원에서 바둑을 두고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는 한가로운 휴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은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양력 1월 1일로 선포했고, 이때부터 우리의 공적 생활은 태양력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양력으로 전환되기 바로 몇 달 전인 1895년 4월 초1일 내각기록국 ⟪관보⟫에 처음으로 요일이 표기되었고, 같은 해 윤5월에는 관청의 집무시간이 발표되면서 일요일의 전휴全休와 토요일의 반휴가 확정되었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일요일이 서서히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태양의 실제 리듬에 근거한 24기의 추이에 따라, 그리고 달의 리듬에 따라 휴무일이 결정되었지만, 이때부터는 해와 달의 실제 리듬과는 무관한 7요일이라는 이질적인 시간 주기가 일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일요일의 휴식 시간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농부의 시간은 요일 주기와 무관한 리듬, 예컨대 식물의 시간에 맞추어 흘러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일요일을 중심으로 하는 7요일 주기에 맞추어 살게 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현재 우리는 공휴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노동에 지친 우리에게 휴일은 그만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휴일 개념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물론 휴일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거나 휴일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계층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리들도 공휴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공휴일이 갖는 의미가 우리와는 다소 달랐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에게 공휴일은 휴식의 최대치를 의미하지만, 조선시대에 공휴일은 오히려 휴식의 최소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당연히 해당 사람의 신분, 지위, 직업에 따라 공휴일의 개념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공휴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인 산물인 만큼, 현재 우리의 휴일 개념을 그대로 조선 사회에 적용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에 산재되어 있는 휴식 관념을 추출해 볼 수 있다. ⟪태종실록⟫ 26권태종 13년 11월 11일 정해을 보면, 관공서에서 급가給暇를 제외하고 “매월 순휴每月旬休, 상사上巳, 중오重午, 중양重陽”에 각 1일씩 휴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순휴일旬休日’은 매월 10일마다 한 번씩 휴무를 취하는 방식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삼가일三暇日이라 하여 한 달에 3번 정도 휴무일, 즉 순휴일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사, 중오, 중양이 휴무였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상사上巳는 음력 3월 3일 삼짇날이고, 중오절重午는 음력 5월 5일 단오이며, 중양重陽은 음력 9월 9일 중구일이다. 상사, 중오, 중양은 모두 양수陽數인 홀수가 중복되는 중수절일重數節日로 양기가 강한 피흉구길避凶求吉의 날이었다. 중수절일 가운데 7월 7일 칠석七夕만 휴무일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인일人日인 1월 7일, 3월 3일상사, 7월 7일칠석, 9월 9일중양의 총4일은 성균관 유생이 절일제節日製를 치르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상사, 중오, 중양에 휴무하는 것은 이런 여러 정황이 고려된 결과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만으로 보면, 조선시대 관리에게는 1년 동안 순휴일 35일, 그 외에 3일, 총 38일 정도의 휴무일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속절俗節에는 정조正朝, 상원上元, 한식寒食, 단오端午, 중원中元, 중추中秋, 칠석七夕, 중양重陽, 동지冬至, 납일臘日 등이 있다. 그렇다면 상사, 단오, 중양을 제외한 정조, 상원, 한식, 중원, 중추, 동지, 납일 등이 관공서의 휴무일로 지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때에는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을 보면 조선시대 관리는 ‘묘사유파卯仕酉罷’라 하여 묘시오전 5~7시에 출근하여 유시오후 5~7시에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해가 짧을 때는 ‘진사신파辰仕申罷’라 하여 진시7~9시에 출근하고 신시3시~5시에 퇴근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묘시에 출근한다는 것은 오전 5시에 출근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에 어느 때라도 출근하면 된다는 것으로 보인다. 유시에 퇴근한다는 것도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 어느 때라도 퇴근해도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겉보기에는 하루 12시간 가까이 일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출퇴근 시간의 운용이 매우 느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시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정시 출퇴근 같은 개념은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간은 항상 “대략 언제쯤”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출퇴근 시간조차도 모호한 공적 시간의 리듬 안에서는 자기만의 사적 시간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법적 강제보다는 개인의 성품과 책임감에 맡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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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조선시대 관리의 출퇴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시대의 시헌력법은 1일 96각법刻法을 사용했고 1각이 현재의 15분 정도였다. 우리는 초와 분 단위로 살아가지만, 그들은 적어도 15분 단위의 최소 시간 감각만을 지녔다. 그러나 시계 없이는 15분 단위의 시간을 측정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감각 속에서 오늘날과 같이 엄밀하게 노동과 휴식의 시간적 경계선이 형성될 수는 없다. 관공서 휴무일 규정에서 정조正朝, 동지冬至, 한식寒食, 중추中秋, 상원上元, 중원中元, 납일臘日 같은 절일이 빠져 있는 것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종 제사를 지내야 하고, 여러 가지 교류 및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그러한 속절에 관리들이 모두 출근해서 열심히 일했을 리는 없다. 아마 그런 날은 모두 알아서 일하지 않기에 아예 휴무 규정조차 필요 없었던 것 아닐까?

 

조선시대에는 출근부를 만들어 근무의 태만을 감독하였으며, 보통은 일정한 출근 일수를 채워야 승진이 가능했다. 우리는 결근 일수를 중시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반대로 출근 일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관직이 아닌 다음에야 많은 관리들이 매일 출근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고과의 평가를 위해 1년 동안 일정한 출근 일수를 채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리들이 출퇴근 시간을 지키지 않아 문제라는 비판의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증보문헌비고⟫를 보더라도, “5일에 한 번 쉬고 10일에 한 번 목욕하는 제도五日一休十日一沐之制”를 철저히 시행해야 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러므로 실제로 ⟪경국대전⟫보다는 관습법이 휴무의 리듬을 규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관습법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기에, 조선시대 사람들의 휴일 관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세세한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시간을 규정하는 법률은 느슨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기만의 휴무의 리듬을 만들어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와는 정반대의 휴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쉬는 공휴일보다는 사적인 사유로 급가를 신청해서 얻는 휴일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적 시간의 리듬보다 사적 시간의 리듬이 더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부모상을 당하면 관직을 그만두고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사적 시간이 공적 시간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기접시, 제사 지낼 때 진설(陳設)할 음식을 담는 그릇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러므로 단순히 휴무 일수를 가지고 조선시대와 현재를 비교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는 제사일이라고 해서 공식적으로 휴가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국대전⟫을 보면 조선시대 관리들은 제사일에 적게는 2일에서 많게는 3일, 또는 5일씩 급가給暇, 즉 휴가를 받았다. 또한 시향時享, 즉 묘제墓祭와 사시제四時祭를 지낼 때에도 당연히 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부모상을 제외한 각종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도 적게는 7일에서 30일까지 휴가를 주었다. 이조吏曹의 급가 규정을 보면, 3년에 한 번씩 부모를 만나러 가거나 5년에 한 번씩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는 데 7일의 휴가, 처와 처부모의 장례에 15일의 휴가, 부모의 병환의 경우 거리에 따라 30~70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도 공휴일은 있었지만, 공휴일의 의미는 우리와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속절로 대표되는 각종 절기와 명절의 리듬, 그리고 제사일의 리듬, 효행의 리듬 같은 것이 공휴일 같은 공적 시간의 리듬보다 우선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휴일과 휴식을 짐작하려면, 좀 더 세세하고 정밀한 자료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글_이창익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며,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와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HK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3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조선시대에 시계가 없었다니요. 종각에서 매 시각마다 시간을 알렸고 해시계는 물론 휴대용 시계까지 있었는데, 시계가 없었다고 쓰신 문장의 근거를 밝혀주십시오.

  2. 이 글의 필자입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 드립니다.

    해시계와 물시계의 존재는 저도 압니다. 제가 알기로는 해시계로 측정 가능한 시간은 아무리 정확해도 15분 간격 정도이고, 물시계의 경우에는 24분 간격 정도입니다.
    그리고 종루에서 치는 종은 인정과 파루 때만 쳤습니다. 종을 매시각 쳤다는 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종을 매시각 치면 밤에 잠 못자는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혹시 그런 기록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신 밤에는 북과 징을 쳐서 시간(경점)을 알렸습니다. 물시계에 연동하여 2시간 간격(경), 24분 간격(점)으로 북과 징을 쳤습니다.
    북 소리와 징소리는 멀리까지는 잘 안 들렸을 겁니다. 종 소리는 더 멀리까지 들리긴 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간은 “보는 시간”이 아니라 “듣는 시간”입니다. 상당한 한계를 지녔을 겁니다.

    제 생각엔, 해시계는 밤이나 흐린 날은 무용지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휴대용 해시계로 15분 간격의 정밀한 시간 측정이 가능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시계든 해시계든 오늘날의 시계와 달리 정밀한 시간 측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관리들이 물시계와 해시계에 의거해 출퇴근을 했더라도, 그 시간은 기껏해야 15분 단위의 시간 감각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궐 가까이 살지 않는 한, 역시 정확한 시간을 “들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제 글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에서 시계라고 했을 때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시계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시계와 물시계는 늘 가까이 두고 바라보기만 해도 시간을 알 수 있는 그런 시계는 아닙니다. 사실 완전한 “시계”라기보다 불충분한 “시간측정장치”에 가까운 듯합니다.

    제가 정확한 표현을 하지 않아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 듯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사항이나 다른 사항에 대해서도 의문나는 점을 말씀 주시면 저도 자료를 더 찾아보고 답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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