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전성시대

 

DBS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 MBC 문화방송의 ‘별이 빛나는 밤에’, TBC 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1970년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젊은이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라디오 앞에서 DJ의 목소리와 음악을 들으며, 그리고 자신의 사연이 소개되는 것에 환호하며 청춘의 꿈을 하나둘 키워나갔다.

아랫목에서 삼삼오오 모여
라디오에 귀 기울이던 1970년대

 

서울 세종로 사거리의 신문박물관. 이곳에 가면 지금은 사라진 동아방송의 옛 인기프로그램을 일부 들어볼 수 있는 코너가 있다. 라디오 모양의 모니터에서 ‘0시의 다이얼’을 누르면 당시 DJ를 맡았던 인기가수 윤형주의 투명한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0시의∽ 다이아르∽”. 그런 시절이 있었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작고 오래된 라디오 하나만으로도 세상과 소통하고 미래를 동경하던 1960, 70년대.

1970년대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충남 예산에 살았던 나는 권투선수 홍수환, 유제두의 세계타이틀매치나 김일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릴 때면 종종 뒷산 넘어 과수원집으로 TV를 보러 갔다. 거기 가면 우리 동네 아이들 열댓 명이 모여 있었다. 도시로 유학 나간 형들이 돌아온 방학에는 형들과 함께 만화방에 가서 돈을 내고 TV로 권투경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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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TV가 없었기에 우리 가족이 주로 의존한 것은 라디오였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라디오를 틀어 놓으셨다. 아침 7시 50분, 10분짜리 KBS 일일연속극 ‘안녕하십니까’를 들으며 학교로 향했다. 그 유명한 성우 구민이 주연이었다. 겨울 날 저녁식사를 마치면, 우리 가족은 아랫목 이불 속으로 발을 모으고 조용히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드라마를 듣기도 했고 ‘재치문답’과 같은 교양오락프로그램에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우리 집 라디오는 때로는 큰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작은 것이기도 했다. 큰 것에 대한 기억은 잘 남아 있지 않다.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지금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커다란 밧데리를 연결하셨다. 지금과 달리 작은 건전지가 귀하고 비싸던 시절이었기에 오래 가는 커다란 밧데리 배터리를 연결했다. 그것이 덜렁거리지 않도록 아버지는 검은색 고무줄로 친친든든하게 자꾸 감거나 동여매는 모양 감았다. 때로는 노란 기저귀 고무줄로 감기도 했다.

상상력을 키워줬던
나의 전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라디오로 권투, 레슬링, 축구, 야구 등 스포츠 중계방송을 참 많이 들었다. 시골에 살다보니 음악 방송보다는 스포츠 중계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1977년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프로권투 세계타이틀매치도 라디오로 들었다. 4번 다운 당하고도 카라스키야를 KO로 누르던 홍수환. 그 급박한 상황을 라디오로 듣고 있노라니, 그야말로 오금이 다 저렸다. 작은 골방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던지.

충남 논산에서 살 때는 중학생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야구에 빠져 있을 때였다. 당시 고교 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무렵 우리 집에는 여유분의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미제였던 것 같은데, 손바닥 절반 정도 크기였다. 적당히 둔탁한 검은색 가죽 커버가 매력적이었다. 튼튼하고 성능도 좋았다. 아버지가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모르지만, 그게 방안을 굴러다녔다. 그렇다 보니 온전히 나의 전용 라디오가 되었다. 행운이었다. 그 라디오로 틈만 나면 열심히 야구중계를 들었다. 군산상고, 경북고, 대구상고, 부산고, 경남고, 광주일고, 선린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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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지스터 라디오. 빨간색 본체의 앞면은 스피커 형태의 은판이,
옆면에는 채널과 볼륨 조절 다이얼이 부착되어 있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특히 군산상고와 광주일고의 야구중계를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건 군산서해방송과 광주전일방송 덕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두 방송은 군산과 광주에 있는 작은 라디오방송국이었다. 이들은 동향의 군산상고과 광주일고의 경기는 거의 모조리 중계 방송했다. 논산은 군산과 가까운 지역이었기에 이 방송들의 전파가 나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잡혔다. 작지만 성능 좋은 전용 라디오 덕분에 나는 당시 야구 명문 군산상고와 광주일고의 야구 전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라디오를 보여주면서 야구 소식과 상황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나는 야구 중계를 들으며 아나운서들의 특징까지 다 외었다. 안타가 나왔을 때, 공이 담장을 넘어가 홈런이 될 때, 그 순간을 표현하는 아나운서들의 중계방송 멘트와 습관이 모두 달랐다. “안 탑니다”, “홈런~”의 외침 한 마디만 들어도 그게 어떤 아나운서인지 구분해냈다. 그리곤 늘 그걸 흉내 내면서 다녔다. 그 때까지 야구 경기장에 가본 적도 없고, 야구 경기를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야구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드라마틱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의 도움이 컸다. 라디오는 이렇게 나의 상상력을 키워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집은 12인치 흑백 TV를 한 대 샀다. 1979년이었다.

1927년 라디오 방송국 출범
라디오 드라마‧성우‧DJ까지 최고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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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라디오 A-501. 1956년 금성사에서 만든 첫 국산 라디오로
등록문화재 제559-2호로 등록되어 있다.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은 1927년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경성방송국이 출범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1950년대 이후 방송국이 늘어나면서 1960, 70년대에 라디오 방송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무렵 국산 라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라디오방송 인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디오의 대중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첫 국산 라디오는 1959년 금성사에서 만든 ‘금성 A-501’. 당시 국산화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딛고 부품의 60%를 국산화해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금성사는 1962년 미국에 라디오 62대를 수출하기도 했다. 그것은 국산 가전제품 첫 수출 기록이기도 하다. 이 ‘금성 A-501’ 라디오는 현재 서울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같은 변화에 힘입어 라디오 드라마도 인기를 누렸다. 저녁 시간이 되면 라디오 앞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청춘들은 드라마보다는 심야 음악프로그램을 즐겼다. 가수 윤형주, 이장희를 비롯해 전문 DJ인 최동욱, 이종환 등이 라디오의 스타 DJ로 인기를 누렸다. 이들에게 사연을 보내고, 그것이 선정되어 방송에 나가고, 선망하는 인기 DJ들이 코멘트를 해주고. 당사자 젊은이들은 아마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동아방송의 ‘밤의 플랫폼’은 1970년대 인기 심야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우 김세원이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소개한 안내기사 내용은 이렇다. ‘가을은 밤하늘의 별빛이 한층 차가와지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연인들의 뜨거운 입김과 밀어는 이 가을밤의 냉기를 소리 없이 녹이고 맙니다. 김세원의 매력 있는 목소리가 연인들의 사랑 얘기를 달콤한 음악에 실어 드립니다.’

이 프로그램의 시그널뮤직은 폴모리아 악단의 ‘맨발의 이사도라’였다. 여기에 감성적이고 우수 어린 김세원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이 프로는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수많은 청춘들의 지친 내면을 위로해주었다. 그것이 1970년대의 라디오 방송의 한 특징이었고 동시에 하나의 문화였다.

라디오 드라마를 주도하는 성우들의 인기도 대단했다. 지금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탤런트 사미자, 전원주도 애초엔 라디오 성우 출신이었다. 1960, 70년대 TV가 드물던 시절에 라디오는 이렇게 정보 교양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라디오를 기억하는 방식

 

강원도 영월에 가면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이 있다. 영화 ‘라디오 스타’박중훈, 안성기 주연의 촬영 주 무대였던 KBS영월방송국을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다. 영월방송국은 아주 작은 시골 방송국이었다. 방송국이라기보다는 시골지역 청취자들을 위해 KBS의 라디오 방송 전파를 관리해주는 곳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짬을 내 지역민을 위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보냈던 것이다. 1970, 80년대에는 지방에 이런 곳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KBS 영월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영화 ‘라디오 스타’의 인기와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2015년 이곳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해 개관한 것이다. 이곳은 라디오의 역사도 보여주지만 그야말로 영화 ‘라디오 스타’의 추억에 빠지게 한다. 영월라디오스타박물관에서는 직접 DJ 체험을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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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 대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라디오 카페, 마을 방송 등이 생기고 있다. 소출력으로 특정 지역에서 청취가 가능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다. 일종의 라디오 공동체다. 라디오는 편하고 정감이 있기 때문에 흡인력과 지속력이 강하다. 이런 것을 통해 지역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는 토대가 된다고 한다. 충남 공주 산성시장의 경우, 시장 상인들의 유대를 강화하고 소비자 관광객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기도 한다. 올 여름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선 ‘해변라디오 북카페’를 운영할 예정이다.

이 모든 움직임의 한편에는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다. 이는 결국 우리가 라디오를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라디오 방송의 기술이나 방식이 바뀌었고, 라디오의 하드웨어가 완전히 바뀌었어도, 그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소리를 만날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끝없이 상상하고 꿈 꿀 수 있다는 점. 우리가 라디오의 추억에 빠지는 것도 이런 까닭일 것이다.

글_ 이광표 | 동아일보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홍익대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했다. 저서로 《사진으로 보는 북한의 문화유산》, 《국보 이야기》, 《손 안의 박물관》 등이 있으며, 《영혼의 새》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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