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효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허벅>

갈증을 헤아리는 지혜

제주도는 대부분의 지질이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수량은 많은 편이지만 이 물은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고 이내 지하로 스며들어 빠져나간다. 그 흔한 우물도 없고, 동네를 가로지르는 냇물은 조금만 가물면 이내 말라버린다. 사방에 넘실대는 것은 짜디짠 바닷물뿐. 그 옛날 제주도 사람들은 목이 말랐다.

물이 귀한 제주,
매일 용천수를 찾아 걷다

“상하수도 시설이 놓이기 전까지, 제주도에서는 식수를 구할 방법이 많지 않았어요. 지금이야 제주도 삼다수라고, 좋은 물이 풍부하다고 여겨지지만 최대 강수량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온통 밑으로 빠져 나가버리니 도무지 마실 물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가까우면 10리, 멀면 40~50리를 걸어 물을 길러 다녔죠. 그 물을 담아와서 물을 마시고, 음식을 해먹는 등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주도는 해안가에 용천수가 있었다. 땅에서 솟아 오르는 마실 수 있는 물이다.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용암층에서 흐르는 동안 정화되고, 돌 틈에서 솟는다. 여기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물을 담는 허벅이다.

“일반적으로 성인이 맬 수 있는 허벅에는 5~6되의 물이 들어가요. 이정도 물이면 온 가족이 하루쯤 쓸 수 있었죠. 그것보다 조금 작은, 14~15세의 소녀들이 맬 만한 크기의 것은 대배기, 어린 아이들이 맬 수 있는 허벅은 애기대배기라고 불렀어요. 왜 허벅이 이렇게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을까요? 결국은 물이 귀했기 때문이에요. 모처럼 뜨러 가는 물, 같이 간 가족들이 한 사발이라도 더 떠온다면 그만큼 가족들이 마실 수 있는 물이 확보되는 거니까요. 아이들 손이라도 빌리는 거죠.”

용천샘에서 물을 뜰 수 있는 것은 바닷물이 빠지는 하루에 한 번, 많으면 두 번뿐이다. 물때를 잘 맞춰 가지 않으면 그만큼의 식수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고, 다음 물 때까지 물을 길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가 된 샘터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동네의 소식도 전해 듣고, 그러다 흥이 돋으면 허벅을 악기 삼아 허벅장단에 맞춰 노래도 불렀다. 지붕 없는 마을회관이었다.

“보통 여자들이 물 길어오는 일을 하긴 했지만, 남자들이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혼자 산다거나 부인이 아프다거나, 혹은 집안에 더 많은 물이 필요할 때면 남자가 ‘바릇허벅’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허벅에 물을 가득 담아오기도 했어요. 환한 낮에 가면 여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사람들 없는 시간에 가서 담아오거나 했죠. 물 긷는 일은 제주도 사람들 모두의 일이었어요.”

curator_161215_01

허벅은 ‘물구덕’에 넣어 어깨에 맸다.
바닥에 돌멩이가 많아 잘못 디디면 큰일이다._홍정표 촬영
curator_161215_01

허벅과 바릇허벅맞춤허벅
 

허벅, 나무에서 옹기로
그 기록에 대하여

“제주도는 위치 상 뭍에서 유배를 떠나오는 관료, 지식인이 많았어요. 그 덕에, 제주도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 지식인들이 아무것도 없는 제주도에 가서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주변은 낯설고, 그래서 하나 둘 기록을 남긴 거죠. 그 기록들에서도 제주도 사람들이 물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담겨 있어요.”

이경효 학예연구사는 허벅을 조사하면서 허벅이 현재의 자기 형태로 만들어진 시점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전 기록부터 1702년 무렵,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머물며 주변을 기록한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길러 ‘목통木桶’을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적혀 있다. 그러던 것이 1732년경 조관빈의 <회헌집悔軒集>에 ‘병’이 언급되고, 1777년부터 유배생활을 한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서 ‘물병 지고 물 길러 가며 재잘거리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허벅이 옹기로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1732년을 상한으로 18세기 중후반 무렵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기록들에서 신기하게 여겼던 것이, 아낙들이 이 병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등에 매고 다닌다는 부분이에요. 제주도는 바닥에 돌멩이가 많아요. 제대로 못 보고 걷다가는 넘어지기 일쑤죠. 하물며 머리 위에 그 귀한 물을 얹고 가다가 돌을 못보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허벅은 깨질 것이고 물은 버리게 되겠지요. 그래서 ‘물구덕’이라고 하는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넣고 그걸 짊어지고 다녔어요.”

그렇게 어렵게 떠 온 물, 그 무엇보다 귀하게 어겨질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쌀뜨물로 설거지를 하고, 행주를 빨고, 걸레를 빨고, 마지막에는 흙길의 먼지를 가라앉히는 일까지, 물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했다. 물을 허투루 대하다가는 엄마에게 혼나기도 일쑤였다. 그렇게 알뜰하게 아끼며 썼다.

촘받음항이라는 것이 있어요. 나무에 촘을 걸어 두고 빗물이 그 촘을 타고 흘러 옹기에 모여들게 하는 거예요. 혹시나 물을 길러 가지 못하는 때에는 그 물을 생활수로 활용하는 거죠. 정말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허벅은 생명수다

 

허벅은 입구가 좁고 어깨부터 넓어진다. 물을 담고 덜어내는 것이 이 그릇의 역할이라면 좁은 입구가 오히려 불편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괜히 그렇게 만들었을 리 없다. 좁은 입구는 등에 짊어지고 옮기는 동안 물이 허벅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넓은 어깨는 허벅에 담긴 물이 오르고 내리면서 흔들거리되 절대 밖으로 흘러 넘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선 채로 몸만 기울여 물을 따라내기에도 탁월한 구조였다.

“허벅을 만드는 장인이 얼마나 고수인지는 바로 여기에서 가늠할 수 있어요. 허벅은 바가지로 물을 퍼 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샘에 허벅을 담가두었다가 물이 차면 끄집어 올렸거든요. 잘 만든 허벅은 입구에 손을 넣었을 때 90도로 탁 꺾이면서 허벅을 들어올릴 수 있는 각이 기가 막히게 나와요. 이 부분을 잘 빚지 않으면 허벅을 끌어 올릴 때 손에서 미끄러져 깨져버리죠.”

curator_161215_03
허벅에 담아온 물을 물독에 옮겨 붓는 여인

 

물 뜨러 갈 일이 없는 제주에는 이제 허벅을 만드는 전문 직업은 사라졌다. 1960~70년대까지 허벅을 빚던 마지막 허벅 장인들은 이제 농사를 짓거나 다른 일을 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오랜 삶이 담긴 허벅이 이렇게 맥없이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허벅이 기록에만 머물지 않도록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장인들의 손끝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경효 학예연구사가 찾아간 그들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허벅 만드는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분들께 각자 맡았던 일에 대해 여쭈어보면 말씀하면서 이미 손은 허벅을 빚고 있어요. 발 끝으로 물레를 돌리고 손 끝으로 허벅의 벽을 다듬죠. 이제는 가마터도, 작업장도 다 사라졌지만, 혹시 예전처럼 재현해 두면 만드실 수 있겠느냐 여쭈었더니 말할 것도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허벅 제작 과정 기록을 위해 작업 환경을 만들어 드렸더니 바로 시작하시더라고요. 역시 장이들은 장이구나, 기술은 잊히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curator_161215_04
장인들의 손 끝에 아직 허벅의 온기는 남아있는데, 이제 우리는 물이 필요하면 수도꼭지를 돌리고, 목이 마르면 정수기 버튼을 누르는 삶을 살고 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물이 귀했던 제주도는 좋은 물이 나는, 제주도 고유의 브랜드도 갖게 되었다. 장인이 굴 속에서 허벅을 굽고, 그 허벅을 매고 해안가를 매일같이 다니던 엄마가 길러온 물을 마시는 일은 전래동화처럼 아주 먼 일이 되었다.

“허벅은 생명수예요. 제주도 사람들을 하루하루 살게 했던 생명수.”

허벅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제주도 사람들이 기특해 하늘이 건넨 선물인지도 모른다.

인터뷰_ 이경효 |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글_ 편집팀

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03045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대표전화 02-3704-3114    팩스 02-3704-3113

발행인 천진기    담당부서 섭외교육과  © 국립민속박물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