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 고수들의 비장한 한 수

묵의 문화

묵은 도토리, 메밀, 녹두 등을 갈아서 앙금을 앉힌 후 죽처럼 쑤어서 엉기게 해 식힌 것이다. 예전에야 통곡을 직접 갈아서 만들었지만 요즘은 각각의 전분을 구할 수 있으니 물 비율만 맞춰 손쉽게 묵을 쑬 수 있다. 그래도 이 물의 양을 가늠하는 것이 아주 쉬운 것은 아니어서 묵 잘 쑨다는 사람마다 나름의 황금 비율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도토리묵만 보더라도 어떤 이는 도토리가루의 다섯 배로 물을 맞추라 하고 어떤 이는 여섯 배가 기본이라고 한다. 얻어먹는, 혹은 사서 먹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묵 쑤기에 나서지만, 찰랑찰랑 윤기 자르르한 묵 한 모 얻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손맛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손맛이라 하면 정말 손끝에서 나는 맛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손맛이란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냉철한 판단력에 다름 아니다. 계절,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원재료의 상태도 봐야 한다. 냄비 하나만 보더라도 양은 냄비인지 스테인리스 냄비인지에 따라 묵 쑤기 방법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부피를 불리는 조리법으로 탄생한 ‘묵’

묵은 두부와 함께 옛사람들이 즐긴 별식이었다. 때로는 묵을 두부의 한 가지로 보기도 했던 모양인지 《事類博解사류박해1885처럼 녹두묵을 綠豆腐녹두부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상수리나무에서 따는 도토리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이었고 메밀과 녹두는 옛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었던 밭작물이었다. 구황음식은 대개 적은 양의 재료를 가지고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부피를 불리는 조리법을 택하기 마련이다. 죽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좀 더 발전시켜 맛이 좋은 별미로 발전시킨 것이 묵인 것이다. 같은 재료로 만들지만 죽과 묵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그 간극이 크다. 메밀로 죽을 쑤어봤자 풀떼기 맛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참기름과 소금 약간 쳐 굳히면 보들보들, 야들야들 그야말로 입 속을 희롱하는 별미로 탄생한다.

이성우 선생이 지은 《한국요리문화사》에는 시인 박목월과 소설가 이병주가 남긴 ‘묵맛’에 관한 글이 언급되고 있다. 박목월은 ‘벌건 윤즙을 묵에 듬뿍 찍어 먹게 되면 입 안이 얼얼하고도 구수하고 시면서 달다. 그것이 묵맛이다. 그것을 안주 삼아 뿌연 막걸리를 목안에 부듯하게 한 사발 걸치면 제법 한량같은 느긋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윤즙은 초고추장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초간장뿐만 아니라 초고추장에도 목을 찍어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득하게 쑨 옛날식 메밀묵에 묵지근한 막걸리를 곁들이되 상큼한 초고추장으로 반전을 기한 식도락이 읽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한다. 이병주 역시 어린 시절 친척집에서 얻어먹었던 찰메밀묵맛을 잊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 때의 메밀묵은 색깔이 탁하고 그 모양은 비록 볼품이 없었으나 입안과 목구멍을 가득히 채우는 텁텁하고 구수한 맛이 멍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의 음식점에서 내놓는 묵이란, 반질반질하게 다듬은 도회지의 건달녀석들처럼 쏙 빠지게 말가숙하기는 하나 입안에 들어가면 갈분가루 냄새만 날 뿐 목맛이라곤 통 없다.’라고 쓰며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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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물을 들인 황포묵
화병 난 사람 입에는 더욱 단 녹두 제물묵
고픈 배를 달래려 먹었던 도토리묵

녹두묵도 메밀묵만큼이나 많이 먹어 내렸던 음식이다. 황필수가 지은 《名物紀略명물기략1885을 보면 노란 색이 도는 묵을 黃泡황포, 파랑 것을 淸泡청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황포는 치자물을 들인 것이다. 지금도 전주비빔밥에는 반드시 치자물 들인 황포묵을 넣는다. 이 황포와 청포는 만드는 법이 제법 까다롭다. 녹두녹말을 내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녹두녹말은 실제로 만들어 보면 정말 얻기가 어렵다. 워낙 분이 고와 날리기 때문이다. 묵을 쑤면 반투명한데 굳으면 맛이 덜하니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다시 투명하게 만든 후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친다. 미나리향, 참기름향, 김의 달큼함이 어우러진 청포묵 무침인 탕평채 맛을 상상한다면 그 호리낭창한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녹두라 하더라도 제물묵이라고 해서 갈아낸 그대로 묵을 쒀서 굳히면 녹두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살아있는 묵을 맛볼 수 있다. 껍질이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 빛은 더 진해진다. 이렇게 만든 제물묵은 메밀묵만큼이나 크리미해서 마치 달지 않은 양갱을 먹는 맛이 난다. 예전에 충청도 어느 농가에 취재를 갔을 때 풍성하게 차려낸 여름 쌈채와 함께 귀한 녹두 제물묵이 상에 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다른 반찬 모두 제치고 간장도 치지 않은 묵을 맨입에 마냥 먹었다. 소금간이 어찌나 제대로인지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빙긋 웃으며 건네는 주인 한마디에 그만 묵맛이 달아나고 말았다. ‘녹두 제물묵이 입에 단 사람은 화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녹두란 것이 해독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름난 식재료인데 가슴에 맺힌 게 얼마나 많으면 아무 양념 치지 않은 녹두묵이 그렇게 맛있겠냐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을뿐더러 그간 때때로 울화가 불쑥불쑥 치밀곤 했던 기억이 떠올라 멋쩍게 웃으며 가슴을 두어 번 팡팡 치고는 말았다.

녹두묵이나 메밀묵과는 달리 도토리묵은 주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었던 음식이었다. 1800년대 초반 서유구가 지은 《甕餼雜誌옹희잡지》를 보면 “흉년에 산 속의 유민들이 도토리를 가루내어 맑게 걸러내어, 이것을 쑤어서 청포처럼 묵을 만드는데, 이것은 紫色자색을 띠고 맛도 담담하지만 능히 배고픔을 달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빛깔도 거무튀튀하고 쓴맛이 도는 도토리묵이야말로 배고프지 않으면 굳이 찾아먹고 싶지 않았던 서민의 음식이었다. 제대로 재료 갖춰 맛나게 무쳐먹을 처지도 못 되었을 테니 그저 간장 조금 쳐서 먹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던 것이 오이며 쑥갓 듬뿍 넣고 들기름 고소하게 쳐서 먹어보고 하니 그만한 별미도 없었던 모양인지 언제부터인가 묵이라고 하면 도토리묵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최근에는 칼로리가 높지 않으면서도 포만감이 있는 대표적인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게 된 것이 도토리묵의 처지다. 충청도 지역의 향토음식으로나 알려져 있던 말린 도토리묵은 최근 꼬들꼬들한 식감과 낮은 칼로리로 인해 비싼 돈을 주고야 살 수 있는 별미 재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랑스런 민족음식, 북한의 요리》를 보면 북한에서 먹는 묵의 종류를 엿볼 수 있는데 메밀묵과 도토리묵, 녹두묵 외에도 강냉이묵, 풋강냉이묵, 강냉이농마묵 등 강냉이를 이용한 묵의 종류가 여럿 보인다. 쌀 대신 강냉이를 식량으로 배급하는 경우가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강냉이를 이용한 묵 요리법이 꽤 발달한 모양이다. 고춧가루기름장을 쳐서 먹기도 하지만 오이, 미역, 다시마 등을 채쳐서 시원한 찬국이나 콩국에 말아먹는 조리법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차게 식힌 닭고기국물에 말아 먹으면 아주 맛이 좋다고 나와 있는데 한번 시도해볼 만하지 싶다. 칼로리가 낮은 식품의 대명사로 꼽히는 닭가슴살을 곁들여 시원하게 들이켜는 강냉이농마묵 냉국이 어쩌면 도토리묵잡채를 물리칠 회심의 다이어트식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글_ 이명아 |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을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로 있다. 전통 식문화와 한국의 농식품에 관한 글을 쓰는 매거진 에디터 출신의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요리 연구가로 향토 음식에 바탕을 둔 외식 메뉴 개발과 농식품 마케팅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림_ 신예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여행과 음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여행자의 밥 1, 2〉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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