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에 대해 살피다

남자 수염의 의미

수염鬚髥은 2차 성징을 넘긴 남성의 입가, 뺨, 턱 등에 자라는 털로, 사람에 따라 그 길이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보물 제1478호 <조씨삼형제초상趙氏三兄弟 肖像>만 보아도 세 형제가 모두 수염의 형태가 다르다. 평양 조씨 조계趙啓,1740~1813, 조두, 1753~1810, 조강趙岡, 1755~1811 삼형제를 하나의 화폭에 그린 초상화로, 세 형제가 서로 얼굴은 닮았으나 첫째인 조계는 염소와 비슷한 턱수염을, 둘째인 조두는 두 갈래로 갈라지고 숱이 많은 풍성한 수염을, 셋째인 조강은 한쪽 귀 끝에서 다른 한쪽으로 이어진 무성한 수염을 기르고 있다. 신분을 막론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성인 남자라면 수염이 자라지만 그 생김새가 개성을 드러내니, 수염에 대해서만은 기르고 싶은 대로 기를 수 있었을 것이다.
 
 

무릇 남자의 의표를 일컬을 때에
반드시 그의 수염을 먼저 말한다

 
19세기 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식으로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槁>에는 수염에 대한 글이 기재 되어있다. 인사편人事篇 인사류人事類 신형身形에는 「수염변증설鬚髥辨證說」 이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무릇 남자의 의표儀表를 일컬을 때에 반드시 그의 수염을 먼저 말하여, 수염이 아름답다고 한다凡稱男子之儀表 必先言其鬚髥 曰美鬚髥.”라고 하며 중국과 조선의 이름난 수염과 그 종류, 그리고 그것에 얽힌 일화를 정리한다.
 

이규경은 중국의 제왕부터 조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수염을 자신의 시각에서 정리하며, 제왕의 수염 중에서는 한나라의 고조와 후한의 광무제, 주나라 문왕이 아름다웠다고 꼽는다. 역대 제왕의 수염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당 태종의 수염으로, 송나라 시기의 요관姚寬이 저술한 <요씨잔어姚氏殘語>에는 태종의 수염은 규염虯髥, 빛깔이 붉고 뿔이 난 새끼 용인 규룡이 도사린 것 처럼 꼬불꼬불한 수염으로 그 수염 끝에다 활 하나를 걸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규경은 이에 대하여 한 가닥 수염에 활 하나를 거는 것은 지나친 말이라고 평한다.
 
이 외에도 이름난 수염으로 손권의 보라색 수염紫髥, 미염공美髥公이라 불렸던 관우의 삼각염三角髥, 소동파蘇東坡의 비탈의 푸른 대나무처럼 무성하고, 봄밭의 곡식처럼 풍성한 수염 등을 꼽는다. 그는 또한 수염의 종류를 창처럼 빳빳하게 생긴 것, 고슴도치의 털처럼 생긴 것, 풀 처럼 생긴 것, 주먹처럼 굽은 것으로 분류하며 이루 다 셀 수 없다고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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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 사진_문화재청윤형식 소유
 

그렇다면 조선에서 수염으로 유명한 사람은 없었을까? 이규경은 수염으로 이름난 사람은 들어본 적 없으나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 1614~1690과 월주月洲 소두산蘇斗山, 1627~1693의 수염이 유명하다고 기록한다. 이상진과 소두산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모두 구레나룻이 뺨에 가득하였다고 하는데, 전주 출신의 이상진을 자웅雌熊이라 하고 익산 출신의 소두산을 웅웅雄熊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유명한 수염으로 공제 윤두서의 자화상 속의 수염을 빼 놓을 수 없다.

 
 

임금의 총애를 위하여 수염을 자르고,
자식이 죽어서 수염을 자르고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초고五山設林草藁>에는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 수염을 깎아버린 사람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성종 때, 종친의 먼 친척 중 한 사람이 아름답고도 수척이나 되는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용모는 훤칠하지 못하였으나 성종이 돌보아주기를 특별이 하여 상을 내리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그가 부인에게 “내 모습을 누워서 생각하니, 이와 같은데도 임금이 특별히 대우하여 여러 신하 가운데 나보다 나은 자가 없다. 내가 만약 이 긴 수염을 자르면 임금의 은고가 더욱 깊을 것이다.”라 하며 손에 가위를 잡고 수염을 잘라 턱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성종이 어느 날 그를 급하게 불러 들였는데, 내시같이 수염이 없는 모양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정황을 말하니 성종이 크게 노하여 내보냈다. 외모는 별로이나 수염이 아름다워 그를 귀하게 여겼다 하니 어떻게 생긴 수염인지 궁금하나 이 글에는 그의 수염 모양이 어떠한지에 기록이 없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과 예학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영수이자, 조선 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 나간 인물이다. 허목의 수염에는 자식의 죽음과 관련된 슬픈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영남의 의춘宜春, 현 의령군으로 피난을 갔을 당시, 나이 40이 넘어 막내딸을 얻었는데, 성격이 순하고 장난을 칠 때에도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어 매우 사랑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허목이 타지에 있다가 꿈을 꾸었는데 아이가 초췌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어서 너무 놀라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미 학질과 천연두로 죽은 지 하루가 지난 후였다. 죽은 아이는 이제 8살이었다. 허목은 곡하고 입관하는 것을 지켜보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 관 속에 넣었다. “이승과 저승이 영원히 멀어졌으니, 이것으로 나의 얼굴을 대신한다.”고 하며 아이의 빈소에 말하기를 “아, 죽은 자는 모르는가, 아는가. 한갓 부모만 살아남아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끝없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죽은 아이를 담은 관에 자신의 얼굴을 대신하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서 넣어 주었던 허목의 수염은 모양이 어떠하든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한다 할 수 있겠다.
 
 

턱이 판판하고 수염이 없으니
장차 장가들 길이 없을 것 같구려

 
수염에는 다양한 모양이 있고, 아름다움으로 임금의 총애를 사기도 하고, 슬퍼하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남성다움의 상징으로서의 수염도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숙종 때 박두세朴斗世가 지은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에는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가는 주인공 ‘나’가 등장한다. ‘나’는 충청도에 사는 선비로 29살이지만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던 도중, 요로원에 이르러 주막에 들르는데 우연히 같이 머무르게 된 서울 양반이 고단하고 초라한 행색의 시골 선비인 ‘나’를 무시한다. 서울 양반은 그의 행색을 보고 ‘그대 몸이 단단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듯 하고, 턱이 판판하고 수염이 없으니 장차 장가들 길이 없을 것 같구려.’라고 말한다. 장가를 드는 것은 성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만약 장가를 들지 못한다면 계속 아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염 없는 아이’와 ‘수염 있는 어른’의 이미지를 대조함에 따라 29살이 되도록 수염도 없고 장가도 들지 않은 ‘나’는 사회적으로 온전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아이의 처지에 머물러 있는 처지임이 강조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뒤집어서 자기 역할을 하는 어른 남자는 수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남자들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며 앞에서 언급한 이규경 또한 <수염변증설>의 첫머리에 ‘나는 수염이 적은 데다 성질마저 옹졸하므로 자칭 수염 난 아낙네髥婦라고 하였는바, 공연히 고금의 사람들이 수염이 아름다운 자를 부러워했기 때문에 이 변설辨說을 짓는다.’며 수염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낸다. 이처럼 수염은 남성다움의 지배적인 상징이었다.

 
 

물을 들인 나머지 하얀색이 변하여
그만 감벽색이 되어

 
수염이 남성다움의 상징이라지만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은 또한 나이 듦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양반의 경우 흰 머리는 갓이나 탕건으로 얼마든지 가릴 수 있었지만 턱 아래에 자라는 수염은 관우처럼 수염 주머니 속에 넣지 않는 한 숨길 수 없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흰 수염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김용택이라는 사람이 수염이 매우 많고 성하고 빽빽한데 거의 반쯤이나 희어져 버렸다. 그가 명나라 장수의 접빈관이 되었을 때, 중국 사람이 그에게 수염을 검어지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자, 그 사람 말에 따라 약수藥水로 물을 들였다. 그런데 하얀 색이 변하여 그만 감벽색紺碧色, 검푸른색으로 물들었고 귀신의 형상처럼 되어서 보는 자가 모두 놀라므로 마침내 감히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이수광은 중국 사람이 그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적는다. 비록 푸른색으로 염색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랐으나, 흰 수염을 검게 물들이고자 했던 시도를 통해 김용택이라는 사람이 젊어 보이고자 하였던 욕망을 알 수 있다.

 
 

단발령과 면도

 
그러나 1895년 12월 30일 갑오개혁으로 단발령이 발포되면서 수염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단발령이 시행되는 날, 고종은 태자와 함께 단발을 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정부의 관료, 이속, 군인, 순검 등 관인들에 대한 단발이 시행되었다. 비록 단발령에는 수염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머리털에 대한 태도 변화로 인하여 수염에 대해서도 전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 어렵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장석만은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효경의 구절이 머리털과 수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고, 이러한 규범이 어지럽혀지면서 머리털과 마찬가지로 수염에 대한 태도 역시 혼란을 겪게 되었다고 말한다장석만 「한국적 근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수염깎기와 남성성의 혼동」 2002: 390. <요로원야화기>에서도 언급하였듯 수염은 관례를 치러야 틀어 올릴 수 있는 상투와 마찬가지로 성인 남자의 사회적 특권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상징이기 때문에 단발령으로 인하여 수염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단발령이 시행된 후 한국인을 위한 이발소가 생긴 시기는 1910년 이후로, 단발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이발소의 수는 점점 증가하였다. 1928년 7월 당시의 인기잡지, <별건곤>에는 전국의 대도시 별로 괜찮은 이발소의 순위를 매기고자 투표를 독려하는 광고가 실리는데 투표참여자들 중에서 1등에게는 상등上等 면도 일개를 증정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머리를 자르고 면도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면도 역시 널리 시행되었으며, 면도기 역시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장석만 「한국적 근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수염깎기와 남성성의 혼동」 2002: 392~393

 
 

수염이 사라진 사극
현재의 남자다움이란 무엇일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남성다움의 상징이라 받아들여졌던 수염이었지만, 최근에는 조선 시대나 그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도 젊은 남자의 수염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사극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역사적 고증이 가장 우선시되었고 남자들은 수염을 길렀으므로 수염을 붙이지 않은 남성 배역이라고 한다면 단종과 이몽룡 정도였으며 그나마도 소년이거나 성인의 문턱에 걸린 역할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성인 역할, 심지어 중전마마가 있는 조선의 군왕을 연기하면서도 텁석부리가 아닌 민퍽아리수염 없는 사람로 등장한다. 젊은 배우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거나, 고증을 포기하였다고 생각하기 보다 수염 없는 그들이 드러내는 현재의 남성성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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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면도 기구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글_ 이인혜 | 국립민속박물관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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