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밀회>

시작은 유아인이었다. 작년 가을, 나도 ‘베테랑’과 ‘사도’ 등 유아인이 출연한 영화를 잇달아 보았다. 그 전까지는 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게 없었는데 단박에 매료되었다. 같이 간 후배가 말했다. “언니, 밀회를 꼭 봐야 해!” 그래서 보게 되었다. 드라마 ‘밀회’를.
 
‘밀회’는 재작년에 JTBC에서 방영했는데 한 마디로 ‘유부녀와 나이 어린 남자의 불륜’으로 소개되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너무 상투적이고 자극적이었으니까. 그랬는데 뒤늦게 낚였다. 빨려들 듯이 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열 편을 보고 나니 하루가 저물었다. 16부작 드라마를 다섯 번쯤 본 것 같다.
 
처음엔 후배의 말대로 유아인이라는 젊은 배우의 매력을 주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이내 유아인으로부터 극중의 이선재로, 그리고 오혜원으로 바뀌었고, 결국엔 배우를 넘어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 연출자와 작가에 가 닿았다.
 
분야는 다르지만 나 또한 30년간 광고를 만들었던 ‘쟁이’이다. 광고쟁이의 이력은 늘 뭔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 곧 ‘쟁이’에 대한 관심으로 이끄는데, 내 눈엔 ‘밀회’를 만든 이 ‘쟁이’들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유부녀와 어린 남자의 사랑, 즉 ‘밀회’ 자체가 이 작가와 연출자의 궁극의 관심은 아닌듯 했다.
 
원래 뭔가를 만든다는 행위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것은 대체로 한 줄의 문장이거나 질문이 되는데 드라마 ‘밀회’는 “앞으로의 인생도 이렇게 살 거니?”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듯 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얼굴로 사는 우리들에게 한 번쯤 멈추고 돌아보도록,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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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것처럼 ‘밀회’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예술 재단의 실장으로 일하는 오혜원.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나 도중에 꿈을 접고 현실에 안착한 마흔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매력적인 유아인이 분한 이선재라는 청년이 그의 학생이자 연인인데, 하지만 드라마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오혜원, 마흔의 그녀이다.
 
그녀는 오너의 환심 속에 재단 내에서의 권력도 누리면서 얄미울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여전히 예쁜 얼굴과 몸을 유지하며 하루하루 잘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 처음엔 부정하고 저항하지만, 그녀의 삶을 비집고 들어 온 그 균열은 끝내 그녀 인생의 방향 자체를 확 틀어 버린다.
 
김두식 교수는 말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고. 사는 동안 누구나 ‘지랄’을 한다고. 시기가 다를 뿐 ‘지랄’의 총량은 같다고. 나는 밀회를 보며 이 ‘지랄의 법칙’을 떠올렸다. 극 중의 오혜원은 어릴 때부터 애 늙은이였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고 성공하는지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그 방식대로 살았다. 사랑도, 결혼도 그렇게 했다. 말하자면 ‘사춘기’란 ‘지랄’의 시기인데 영리한 애 늙은이, 오혜원은 ‘지랄’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나이 마흔에 그 시기와 맞닥뜨린 거다. 그리고 ‘지랄’을 감행한다.
 
하지만 현실이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40년간 지속된 생의 방식을 바꾸려면 아주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인 거다.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사랑. 계산이라고는 모르는 순수한 청년, 현실의 오혜원과는 정반대 지점에서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스무 살의 이선재가 상대인 거다. 만약 오혜원의 상대가 비슷한 나이의 중년 남자였다면 이토록 무모한 사랑에 몸을 던지지는 않았으리. 그러기엔 그녀도, 남자도 너무 많이 지나왔다고 여길 테니까. 그저 잠깐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여기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거다.
 
오혜원이 그동안의 재단 비리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스스로 검찰을 찾아 자백하고 감옥행을 택할 때, 마지막 공판에서 한 얘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선재를 처음 만나던 순간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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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누군가 온전히 저한테 헌신하는 순간이었어요.
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절절한 고백의 말을 해준 것도 아니었어요.
그 친구는 그저 정신 없이 걸레질을 했을 뿐입니다.
저라는 여자한테 깨끗한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애썼던 것뿐인데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누구한테서도 그런 정성을 받아 보지 못했다는 것을요.”

 
이선재를 만나기 전 그녀가 있었던 세상은 계산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었다. 정성 따위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고, 다들 그렇게 계산으로 주고받으니 그녀도 쭉 그렇게 살았다. 그랬는데 이선재에게서 다른 인간을 본다. 난생처음 한 인간으로 온전히 존중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 만남이 그녀로 하여금 돌아보고 질문하게 한다.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인지를. 이 질문은 한때의 사랑을 넘어 다른 인생을 꿈꾸게 하는 아주 과격하고 위험한 질문이었는데, 이 질문을 자신의 가슴에 들여놓고 고심하던 혜원은 결국 인생을 건 결단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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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성주 작가를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이 왜 이런 드라마를 구상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가 서른 넘고, 마흔이 넘어 그제야 본격적인 사춘기를 겪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엔 참 많다. 회사에서도 이런 ‘방황하는 영혼들’을 참 많이 봤다. 십 대 때, 아니 적어도 이십 대 초반에는 방황해야 한다. 원래 길을 찾는다는 것은 방황하는 거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육은 청년들에게 방황을 허용하지 않는다. 방황은 비효율이므로. 시험공부에 전력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방황이겠는가? 그러니 취업을 하고 한숨 돌린 후에야 이런 질문과 만난다. 그나마 늦게라도 이런 질문과 맞닥뜨린 사람은 행운아다. 그런 기회조차 만나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관성적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밀회’는 불륜이라는 자극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실은 질문이다.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처럼 살 거냐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는 훌륭하고 고급스러운데, 게다가 이 드라마엔 클래식 마니아라는 정성주 작가가 직접 고른 아름다운 음악이 16부작 내내 흐른다.
 
생각하며 느끼며 나는 작년 가을을 ‘밀회’에 빠져 살았다. 앞으로를 어떻게 살 것인지 내게도 다시 묻고 답을 모색하면서. 그때의 그 질문이 나를 책방 주인으로 이끌었을까. 나는 이십여 일 전, 강남에 책방을 열었고 이 글도 책방에서 쓰고 있다. 드라마 ‘밀회’를 아직 안 보았다면 지금이라도 보실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드라마 <밀회>

안판석 연출, 정성주 극본으로 2014년 JTBC에서 방영한 16부작 드라마다.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예술 재단 기획실장, 오혜원김희애 분과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 분의 음악적 교감과 처절한 사랑을 그린 감성적 멜로 작품이다.
글_ 최인아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 것도 안할 자유” 등의 카피를 쓴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 제일기획 부사장.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서울’ 등에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며 올해 8월, 강남 선릉 역 부근에 ‘최인아책방’을 열고 책방 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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