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 하는 곳이 아니라고요?!

조선 시대의 주막 풍경

우리는 흔히 조선 시대의 주막이라 하면 술집을 떠올리지만, 사실 주막은 동네 주민들이 술을 마시거나 외식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행객이 잠시 머물며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술집보다는 여관이나 식당에 가까운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행객이 아닌 일반인이 집 밖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은 도시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 근대사회에 들어서고, 우리나라에 외식 산업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1980년대 무렵부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식생활 조사에서 1년 동안 외식 횟수를 0번으로 답하는 집이 부지기수였다.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소?

당시 사람들이 여행길에 먹고 자고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은 ‘역’과 ‘원’이 있었다. 당시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역마와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서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었고,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원’이었다. 퇴계원, 혜음원, 인덕원, 다락원 등의 지명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원’은 고려 시대에 절에서 관리하던 숙박업소로, 때로는 행려병자의 치료와 빈민구제사업도 겸했던 다양한 목적의 시설물이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불교 탄압 등으로 절에서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민간인들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결국 땔나무나 마실 물 밖에 제공하지 못하는 영락한 시설물로 퇴락하고 말았다. 17세기에 박두세朴斗世가 서울에 과거 보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남 아산의 요로원要路院이라는 곳에서 묵게 된 과객의 이야기로 소설을 썼는데, ‘원’을 아주 삭막한 곳으로 표현했다. 주인공은 침구는 물론 반찬으로 장과 소금에 절여 말린 청어도 갖고 다녀야 했고, 심지어 주막에 도착해서는 쌀을 꺼내 밥도 지었다. 방안에서 불을 밝히기 위한 관솔도 갖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원이 없으면 주막에서 자야 했는데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막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1390년에 하륜河崙,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은 경주에서 울산까지 90리 길을 가는 동안 머물러 쉴 곳이 없어 맹수가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채 수풀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200년 가량 지난 16세기 말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희문吳希文,조선 중기의 문신은 70일간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주막에 머문 적이 없었다. 그는 일가친척이나 평소 안면이 있는 양반의 집, 또는 그 종의 집, 일반 백성의 집을 찾아 다니며 잠자리를 해결했는데 전혀 안면이 없는 양반 집에서는 한 번도 묵은 일이 없다. 사극을 보면 양반이 길을 걷다 해가 저물면 민가 앞에서 “이리 오너라” 하여 하룻밤 재워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듯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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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풍속엽서 ‘주막’, 일제 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필요한 건 알아서 챙겨오시오
군불만큼은 뜨끈하게 피워드릴 테니

이러한 여행길의 불편함은 18세기쯤에는 교통 요충지 대로변에 주막이 생겨나고,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주막이 집단적으로 형성된 주막촌도 형성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또 해가 기울면 어두워져서 길을 갈 수도 없지만 야행성인 호랑이가 덮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나루터 주변이나 산기슭 대로변에도 주막이 들어섰다. 18세기 말에 황윤석黃胤錫이 전라도 흥덕현 고창의 고향집과 서울을 오르내릴 때에는 군데군데 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막은 잠자리와 식사, 말먹이만을 해결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당시의 주막은 요즘의 여관이나 모텔처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진 곳이 아니었다. 주막은 오직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놓고 목침만을 갖추어 놓았으며 그것도 대개는 여러 명이 한 방에서 뒤엉켜 자야 했다. 침구도 스스로 마련하여야 했으므로 여행객의 짐보따리에는 온갖 옷가지, 세면용구, 비상식량에 요와 이불까지 끼어 있었다.

다만 군불만큼은 방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때어 주었다. 19세기 말, 처음 조선의 주막에 들른 영국인 지리학자 비숍Bishop, Isabella Bird은 호랑이의 위협 때문에 방문도 열지 못하는 방안에서 방구석에서 메주 띄우는 냄새까지 뒤섞인 40도에 가까운 열기에 잠을 설쳤으며, 몇 해 뒤에 입국한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A:SON Grebst는 조선인들은 아침이면 방에서 빵처럼 구워져 나온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밥 한술, 술 한잔 걸치면
금상첨화 아니겠소
조선 시대의 주막酒幕은 ‘술막’이라고도 했는데, 술막이라는 이름이 변해 숯막, 탄막炭幕이라고도 했고, 점막店幕, 점사店舍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주막의 규모는 대부분 일반 민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쉽게 말해 지금의 민박집과 비슷했다. 초창기의 주막은 아주 소박했지만 19세기말의 주막에서는 돈을 주면 밥, 국, 김치에 각종 나물이나 미역무침, 달걀 따위를 먹을 수 있었고, 때로는 국수에 닭고기에 닭보다 싼 꿩고기를 사먹을 수도 있었다. 주막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람이 하룻밤 묵어가듯 말에게도 꼴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룻밤 묵고 먹는 값을 연가煙價라 했는데, 사람 하나의 연가와 말 한 마리의 연가가 똑같았다.

여행객들에게 잠자리는 제공하지 않고 식사만 제공하는 간이 주막들도 꽤 있었다. 18세기의 김홍도나 김득신이 그린 풍속화를 보면 길가의 밥집에서 주모가 부뚜막에 솥 하나를 걸어놓고 국밥을 팔고 있다. 손님은 나무 그늘 밑 땅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밥을 먹거나 부뚜막 앞에 앉아 국과 두어 가지 찬에 밥을 먹었다. 이곳에서는 술도 함께 팔았는데 안주값을 따로 받지는 않고 술을 사면 술상에 간단한 안주가 딸려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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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풍속도첩》 김홍도의 그림 ‘주막’에 국밥을 파는 주모와 손님의 모습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물론 이런 주막이 간판이 있을 리 없었다. 유럽에서는 문 앞에 담쟁이 가지를 걸어 놓아 술집 간판 대용으로 썼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술 거르는 용수를 높이 걸어놓거나 ‘주’ 자가 쓰인 등을 걸어 그곳이 주막이라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때로는 국수를 파는 집에서는 종이를 국수 모양으로 길게 찢어 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글_정연식 | 서울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다가, 1994년부터 서울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ㆍ2>, <17ㆍ18세기 양역균일화정책의 추이>, <조선시대의 끼니>, <화성의 방어시설과 총포>, <선덕여왕과 성조의 탄생, 첨성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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