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과 장정일 「조롱받는 시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겨울 저녁 세 명의 남자가 만났다가 다음날 아침 헤어지는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셋이 둘이 되어서 헤어지는 이야기다. 밤새 한 명의 남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함께 투숙했던 여관에서 그 남자가 약을 먹고 죽자 그를 두고 몰래 그곳을 빠져 나온다. 남은 두 명은 이 남자의 성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아내가 죽었다는 것, 그 시체를 팔고 사천 원을 받았다는 것, 그 돈을 이 둘과 함께 쓰려고 했다는 것 정도를 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죽은 남자는 책 외판원이었다.남자는 자신을 ‘서적월부판매 외교원’이라고 밝힌다.
 
그 밤에 남자는 책 대금을 받으러 남영동의 어느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밤도 늦었거니와 술에 취한 채로 가서 수금하려고 한 걸로 보아 정말 받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시죠?” 대문은 잠에 취한 여자의 음성을 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누구시죠? 술 취하신 것 같은데……”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하고 사내는 갑자기 비명 같은 높은 소리로 외쳤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이번엔 사내는 문기둥에 두 손을 짚고
앞으로 뻗은 자기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사내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나. 책 외판원으로부터 구입한 아이 손바닥만 한 시집과 시낭송용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시집에는 에드가 앨런 포, 윌리엄 예이츠, 월트 휘트먼 같은 시인들의 시가 있었고, 다소 귀여운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다. 시집과 테이프가 커다란 은색 서류가방 같은 데 들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우리 집에 팔고 간 아저씨의 외모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은색 가방을 열 때의 순간을 각별히 여겼던 것 같다.
 

 
「서울 1964년 겨울」에 책값을 받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장정일의 시 「조롱받는 시인」에는 책값을 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103동 커브를 돌아오는 검은 점을 보고서
시인 장정일씨 얼굴은 똥빛이 되었다
검은 가죽옷 껴입은 월부수금원이
검은 오토바이를 타고, 두 달 전에 10개월 할부로 구입한
현대의 한국문학(범한출판사 간, 32권, 12만 8천원)의
3분기 월부금을 받으러 오고 있었다.
 
기겁한 장정일 시인, 그는
빨리 도망가야겠다고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다가 좋은 싯귀가 떠올라
흰 종이를 타자기에 끼우고 이렇게 두들겼다.

 
상황은 이러하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책 외판원 – 이 시에서는 ‘월부수금원’으로 표현된다 – 을 보자마자 자기에게 오는 것임을 직감한 시인. 시인은 그 남자의 방문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왜? 대략 만이천팔백 원으로 예상되는 월부금을 내고 싶지 않아서.
 
내가 직접 경험한 책 외판원과의 마지막 추억은 대학원을 다닐 때이다. 교양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에 방문한 책 외판원에게 문학 계간지를 정기구독‘당’하고 영인본을 산 적이 있다. 그러고는 연구실의 짐을 정리할 때 아주 깨끗한 상태였던 영인본을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과방에 기증(?)하고 왔던 기억이 난다.
 
우리들의 집에 있었거나 여전히 남아 있는, 세계문학전집과 백과사전 등은 아마도 이런 책 외판원들에 의해 보급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책 외판원이 사라진 직업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책 외판원은 사라졌지만, 그들로부터 산 책과 책을 둘러싼 개인의 기억과 역사는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여전히 대학가에는 책 외판원이 있지 않을까. 지식과 교양이 부족하다고 자책하는 대학생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므로.
 

김승옥
1941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등단. 1965년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1977년 단편소설 「서울의 달빛 0章」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무진기행」을 영화 <안개>로 각색하는 한편, 김동인의 「감자」를 각색·연출하고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각색하여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무진기행》 《환상수첩》 《내가 훔친 여름》 《강변부인》 《한밤중의 작은 풍경》이 ‘김승옥 소설전집’으로 묶였다.
장정일
1962년 경북 달성 출생.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처음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 안에서의 택시잡기》, 희곡집 《고르비 전당포》 《긴 여행》, 장편소설 《구월의 이틀》 《중국에서 온 편지》 《아담이 눈뜰 때》 등이 있다. 그 외에 《장정일 삼국지》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등이 있다.
글_ 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월부책. 오래된, 옛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월부 책,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함께. 아마 1977년 혹은 78년경 나는 을지로 세운상가가 있는 건물의 한 작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이 원래 본시 없으면 없는대로 살고 돈을 꾸는 일도 없었고 월부나 외상을 겁내했었던 그 가족의 일원이었던 나 였는데, 어느날 어떤 분이 사무실에 오셔서 내게 책을 사기를 권했고, 설명을 하도 잘 하셔서인지 나는 덜컥 그 책을 구입했다. 셋트는 아니고 ‘한정혜의 한국요리’ 라는 책 단 한 권 이었는데, 종이도 아주 질이 좋았고 양장본이라 하나? 도톰해서 부엌에 놓고 책을 보며 요리하다가 물이 튀어도 흡수되지 않고 바로 닦으면 된다고 하셨고, 여러가지 먹음직 스러운 요리들이 칼라로 인쇄되어 있어 식욕을 자극했었다. 구경하다 보니 갖고 싶었고, 하여튼 그 책을 사갖고 집에 오자 아버지께서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런 요리를 하려고 책을 샀느냐고, 이런건 내가 더 잘한다, 라고.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한때 잘 나가는 한식 조리사이셨었다. 지금은 요리사가 대세인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요리사는 별로였었는데 특히 남자가 요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별로였던것 같다. 아버지는 주로 당시에 있던 유명한 큰 한식요릿집에서만 일을 하셨었다. 수입도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늘 내가 어디 어디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대단 하셨던 기억도 난다. 하여튼 내 생애 처음 산 그 책이, 아마 내 기억에 그때 그 책값이 내 월급보다는 조금 적었던것 같기도 한데, 10개월 할부에 두어번 냈었나? 그런데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분들은 직장으로 월부책값을 받으러 왔었기에 남은 책값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를 몰랐었다.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며칠 후에 어떤분이 주소를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책 값을 받으러. 다행이었다. 나는 걱정하던차 책값을 주고나니 비로소 발 뻣고 잠을 잘 수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책은 오랫동안 내것, 내 책장을 장식했었다. 그 비싼 책을 사서 요리는 하지 않고 보는것만으로 만족했었다. 지금은 사라진 월부책 장사, 다시금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뭉클 뭉클 떠오른다. 아버지가 해주시던 요리와 함께. 추억이 깃든 그책. ‘한정혜의 한국요리’. 몇 번 이사를 다니다보니 책의 무게때문에 책 먼저 줄여야 했고, 언제 없어졌는지 가끔 추억해 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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