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관청에서 무속 의례를 지냈다?

현판에 나타난 부군당 의례의 주체들

서울에는 한강 유역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마을 제당이 있다. 바로 부군당府君堂이다. 2006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강 유역에만 40여 곳에서 마을 제사가 전승되고 있고, 그중 10여 곳이 부군당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서울 전 지역에 부군당이 50여 곳이 있었다고도 한다. 부군당은 나라에서 주관하여 무속 의례를 지내던 곳이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에, 무속을 탄압하기는커녕 나라에서 무속 의례를 지내는 건물을 설치했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조선 시대에 등장한 ‘부군당’은 무엇일까?

부군당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로 굳어진 것은 없어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하다. 부군당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세기 초 『중종실록』에 나타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부군당의 신들은 다양하다. 부군신은 물론이고 최영 장군이나 임경업 장군, 송씨 부인 등이 모셔졌다. 부군당에서 행해졌던 의례는 무속적 색채가 다분한데 이는 후에 음사淫祀로 간주되어 척결의 대상이 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주목할 점은 부군당이 고려 시대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과 조선 시대 등장하는 부군당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각 관청에 부속 건물로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 부군당은 관청 소속 건물이었던 만큼 이들 제사에 소용되는 비용 또한 정식으로 관에서 지출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유학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고자했던 조선에서, 그것도 공식적인 관청에서 무속적 색채가 다분한 부군당과 그 의례가 행해졌던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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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충동에 있는 관성묘關聖廟,오른쪽와 내부에 장엄된 관우부부의 그림왼쪽 | 사진_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아무리 낮은 관직이라도
부군당 의례 주관으로 날개를 달다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의례의 주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 부군당에서 제사를 지낸 건 주로 그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하급 관리들이었다. 심지어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도 부군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들의 이념은 유학자들보다 자유로웠고 보다 현실주의적이었다. 그러나 지위는 낮았고 그에 따른 현실적인 한계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부군당 의례를 주도함으로써 나름의 ‘상징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그들의 안위를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향은 향촌에서 향리들이 지역의 사직단이나 성황당 의례를 주도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오면 점차 마을 제당으로서의 부군당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관 주도의 의례가 점차 민간 주도의 의례로 변해간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로 서빙고동 부군당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빙고동 부군당에는 19세기 후반 제작된 현판들이 다수 남아 있는데, 현판에 기재된 인물은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었다. 부군당이 서빙고에 소속된 것이더라도 의례는 이미 지역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것이다. 당시 서빙고 지역은 수원 백씨와 강음 단씨가 토호 세력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들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부군당 의례를 주도했다. 이들 중 몇몇은 무과에 급제하거나 품계를 받아 무관직이나 낮은 관직을 하기도 했지만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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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빙고동 부군당에서 가장 오래된 현판1875년 추정.
서빙고 지역에서는 미곡상이나 정미업자, 사업가 등이 부군당 의례를 주도했다. 사진_ 필자 제공

 

서울 곳곳에 여전히 숨쉬는 부군당

대한제국기 마포 지역을 보면 마을 제당으로서의 부군당의 성격은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1903년에 제작된 마포 부군당영당의 현판을 보면 130여 명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들은 대부분 마포를 근거지로 한 객주나 상인들이다. 서빙고동 부군당이 관청 소속 부군당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었다면, 마포 지역 부군당은 이미 지역민들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구 관청에 소속되었던 부군당은 헐려지거나 지역 주민들에게 이양되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면서 부군당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이와 관련된 자들이 많다. 서빙고 지역에서는 미곡상이나 정미업자, 사업가 등이 부군당 의례를 주도하고 있었다. 장충동에 남아 있는 관성묘의 경우에는 중추원 참의 출신이나 경성부회 의원 등 거물급 인사들과 사업가, 상인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울의 부군당은 주로 원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서울 지역 부군당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무관이나 하급 관리 등의 중인·관료들, 객주·상인·사업가 등과 지역 명망가나 유력자 등이 그 의례를 주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외 대다수 일반 주민들도 의례의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의례에도 관여했다면 의례 역시 주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특징적인 민속의 하나인 부군당의 전모를 밝히기는 아직까지 무리가 있다. 기록의 한계를 탓하기보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기록물들, 즉 현판이나 의례 문서에 나타난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그 정체가 언젠가는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민속은 민들의 속이기는 하지만 민에 대한 연구가 우선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16년 4월 29일을 시작으로 매주 금요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물질문화 강좌 ‘근현대 서민생활의 변화’를 마련하였다. 이번 강좌는 민속학·인류학 전공자 및 일반인들의 민속에 대한 이해 증진하고자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유물과 연계하여 마련되었으며 이 글의 필자인 김태우 강사는 5월 27일 <19세기 후반~20세기 서울 지역사회와 공동체의례 주도집단의 변화, 그리고 민속의 주체>를 주제로 강연을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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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김태우 |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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