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정숙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천인천자문

천 명의 지혜가 내 아이에게 닿기를

보석 같은 아이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아비는 천 명의 명망가와 지인을 찾아 나섰다.
한 사람에게 한 글자씩, 아이의 돌이 오기 전에 천 자를 다 채우고 싶었다.
천자문의 첫 자, 하늘 천 자는 박영효에게 부탁했다.
염치없지만 이름과 도장도 함께 당부드렸다.
바리바리 선물과 술을 싸 들고 나선 번거롭고 수고로운 여정.
천 명의 덕망과 지식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힘들지 않았다.
<천인천자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모정 못지않게 깊은 부정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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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천자문>의 첫 장. 박영효가 첫 글자인 하늘 천을 썼다.

 
 

천 명이 한 글자씩, 천 개의 글자를 쓰다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을 만들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했을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천인천자문>은 조선 시대, 집안에 새로 태어난 아이를 위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천 명의 지인을 찾아가 한 글자씩 부탁하여 받아 만든 책이다. 천 명의 지혜가 아이에게 전해져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뜻을 담아 아이의 돌상에 올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천 명의 식견이 모두 아이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던 부모의 정성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천인천자문>은 김교철金敎哲1880~?이 1934년 2월 8일, 그의 아들 정옥正沃의 돌을 기념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의 첫 글자인 하늘 천 자는 박영효朴泳孝1861∼1939,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정치가가 맡았다. 윤치호, 정인보 등 조선 말기에 활동했던 이들의 이름도 보인다. 그리고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인 어조사 야는 이재곤李載崑1859~1943이 썼다.
 
“돌상에 책을 올리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인 것 같아요. <천인천자문>이 우리 상설전시장 ‘돌’ 영역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 입장에서는 ‘아, 돌상에 놓았던 책이구나’하고 지나치기 쉽겠지만,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글자가 각각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아이의 돌상에 놓는 것이라면 정갈하게 잘 쓰인 책을 놓고 싶을 텐데, 왜 이런 걸 놓았을까? 하고 의아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해요. 천 명의 사람들이 쓴 것이라고는 생각 하지 못하니까요.”
 
 

아이야,
나에게 너의 존재는 이토록 위대하단다

 
변정숙 큐레이터는 2014년부터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이 <천인천자문>을 처음 본 것은 2012년의 일이었다.
 
“만일 제가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이 유물을 보았다면, 저 역시 별다른 감흥이 없었을 거예요. 그저 이 책을 만든 사람의 인맥에 놀라워했을 정도였겠죠. 그런데 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치르고, 키워가는 입장에서 보는 이 유물은 고작 그런 정도의 유물이 아니에요. 이 유물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아이 돌잔치 때,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아이를 위한 일기장을 만들었어요. 정말 피곤한데도 잠을 포기하면서 그 일을 했던 건, 아이에게 좋은 기억이라면 하나라도 더 만들어주고 싶고, 남겨주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어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들도 아마 그런 마음에서 이 고단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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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변정숙 큐레이터는 이 유물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뛴다.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부터는 더 각별해졌다. 가족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에는 꼭 이 <천인천자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누구나 청소년기에 겪는 혼란이 있잖아요. 나는 누구이고, 나에게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그런 청소년들에게 너의 존재는 이토록 위대한 것이고, 이 책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대신 말해줄 수 있는 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변정숙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어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예상한 일이다. 그 역시 아이를 갖기 전에는 <천인천자문>이 평범한 유물에 지나지 않았듯, 지금의 청소년들도 세월이 지나면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부모의 마음

 
“천자문이라는 것에는 우주의 구성 원리, 사람이 살며 지켜야 할 도리, 윤리, 이치, 자연의 섭리가 모두 담겨있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내가 내 아이에게 끊임없이 하고 있는 잔소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모로서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잘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만은 같지 않을까요?”
 
그의 말을 들으며 <천인천자문>을 다시 보니, 단 하나의 글자를 부탁하려 종종걸음 끝에 지인의 집 문을 두드리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옹알대다 울기 바쁜 그 작은 아이에게 품은 사랑은 얼마나 깊고, 아이가 살아갈 내일의 길을 곱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은 또 얼마나 절실했을까.
 

“내 삶과 연결되는 유물을 마주하는 순간, 감동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유물을 통해 역사를 살피기에 앞서, 작품 보듯 유물을 감상하면서 유물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교육을 통해서 그 감동을 다시 한 번 전하고 싶고요.”
 
변정숙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천인천자문>은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장 3전시 ‘한국인의 일생’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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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변정숙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사
글_ 편집팀

5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부모님들의 자식을 대하는 마음과 정성을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네요.
    디지털 시대에도 해봄직한 좋은 예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 부모님 사랑은 자신이 부모가 되기 전까진 짐작도 못한다는데..
    천인천자문 보니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자녀를 생각하며 집집마다 걸음걸음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천인천자문을 보기만 해도 따뜻해집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유물도 좋지만
    역사에 문외한인 저에겐 아직은 실생활에 사용되는, 마음이 담기거나 사연이 담긴 유물이 더 끌리는 것 같습니다 ^^

  3.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표현이 과장되고 허세가 가득한 모양새라 걱정이 많습니다. 한자한자 채워진 천인천자문을 가슴에 품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4. 한글자를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고이고이 천자를 완성했을 그 마음이 어떨지
    부모가 된 지금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천인천자문을 만든 그 마음으로 키운 아이들이 많다면 세상이 더 따듯해질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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