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란 나라는 가히 ‘모자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조선 시대, 또 하나의 신분증 ‘모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30년 전인 1885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책을 쓴 사람은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ㆍ1855~1916, 훗날의 명왕성 발견을 예견한 천문학자였다. 그렇다면 책에는 반짝이는 별과 우주에 관한 내용이 가득했던 것일까? 흥미롭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Chosӧ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주인공은 아시아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낯설고 신기한 나라 ‘조선’이었고, 그 가운데서 로웰이 특별히 공들여 설명한 것은 다름 아닌 ‘모자’였다!

 

그들은 모자만 보고도 어떤 사람인지 식별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ㆍ1897~1956가 쓴 『Old Korea』에는 “조선에서 모자는, 중요하다.”라는 문장이 있다. 난데없이 모자가 중요하다니! 모자는 으레 햇빛 가리는 용도로 쓰거나 예의를 차려 옷차림을 완성하는 도구쯤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그마저도 세계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역할이거늘, 굳이 ‘조선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것까지야 있을까?

 

하지만 로웰보다 조금 늦게, 그리고 키스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조선을 다녀간 프랑스의 여행가 조르주 뒤크로Georges Ducrocqㆍ1874~1927의 글을 보면, 당신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키스가 남긴 글이, 조선에서 모자가 갖는 의미와 역할을 딱 하나의 문장으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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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모자만큼은 예외적으로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지위와 계층에 따라 모자의 형태가 다른 것은 물론, 재질도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그들은 모자만 보고도 어떤 사람인지 금방 식별할 수 있다.

 

그랬다. 뒤크로가 만난 조선 사람들은 신분과 성별, 연령과 직업에 따라 각기 다른 저마다의 모자를 지니고 있었으며 상황에 따라 모자를 수시로 바꿔 사용하는 독특한 관습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세계인이 패션의 나라라고 찬탄하는 그의 모국 프랑스인들마저 부러워할만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혼인을 할 때 조선 사람들은 최고의 성장盛粧을 완성하기 위해 족두리와 사모를 썼고 부모 여읜 자식은 죄인이라 감히 하늘을 우러를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에게 삿갓을 씌워 얼굴을 가려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명절이 돌아오면 아이들은 색색의 옷감을 잘라 엮듯 꿰맨 굴레와 호랑이 얼굴 닮은 호건으로 멋을 내고 아낙네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펄럭이는 초록 장옷을 쓴 채 길을 오갔다. 장사하러 먼 길을 다니는 보부상은 패랭이 양쪽에 솜을 달아 표시했고, 포도청 무관은 특별한 날이면 붉은 갓에 호랑이 수염 장식을 꽂아 용맹함을 한껏 뽐냈다. 종묘사직에 제를 올리는 날이면 신하들은 모두 검은 제관을 쓰고 엄숙하게 걸었으며 궐에서 가례가 열릴 때면 붉은 조복에 화려한 금관으로 축하의 마음을 더했다.

 

조선에서 모자는 그것을 쓴 사람이 어떤 신분에 속하는지, 성인인지 미성년자인지, 혹은 무슨 일을 하며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담은 일종의 사회적 ‘코드’와도 같은 것이었다. 관례 후 혼인하지 않은 소년에게는 초립을, 혼인한 성인에게는 흑립을 씌웠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모자의 재료와 색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차이를 자연스럽게 드러낸 조선식 모자 구분법은 이방인들의 눈에 아주 특이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니 모자만 보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다는 뒤크로의 말과 조선에서 모자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했던 키스의 글은, 결국 조선에서 모자가 지닌 고도의 기능성과 상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었던 셈이다.

 

모자1
모자3
모자2

 

여기서는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모자를 볼 수 있다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ㆍ1857~?는 조선을 일컬어 ‘모자의 첨단을 걷는 나라’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 조선을 다녀간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ㆍ1842~1893 또한 “금빛 판지로 만든 신하들의 관에서부터 농민들의 보잘것 없는 머리싸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형태의 모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나라를,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들의 감탄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모자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재료의 종류와 그것을 다루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풀과 나무는 물론 말총을 비롯한 동물의 털과 실, 삼베와 비단 등의 옷감, 심지어 기름 먹인 종이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람들이 모자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재료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덧붙여 로웰은 “갓은 서양에서 유행하는 실크 햇과 같은 등급을 매길 만한 훌륭한 발명품이다. 매우 잘게 쪼갠 대나무와 아주 가느다란 비단실이 재료로 쓰이는데 대나무가 비단실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너무나도 섬세하게 짜기 때문에 어느 것이 대나무이고 어느 것이 비단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는 말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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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모자는 아예 존중 받고 있다고 해야 옳다.
실로 어느 정도까지 모자의 종류가 늘어날 수 있는지
그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여기서는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모자를 볼 수 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우산과 모자가 사촌 간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러한 상상이 가능하다.

 

이방인들은 상상을 현실로 옮겨다 놓은 기발한 모자의 존재, 필요한 모자를 적절한 재료로 만들어내는 조선 사람들의 재주와 감각을 끝없이 칭찬했다. 특히 많은 이방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갈모는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모자에 우산을 달겠다는 기발한 생각은 조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이끌어냈고 마침내 “조선은 친구의 우산을 탐내지 않게 하는 행복한 땅”이라는 유머러스한 찬사마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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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6
모자7
모자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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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자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조선의 모자에 대한 진가를 올바르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더욱 아쉽고 유감스러운 점은
‘모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조선에 보내는 찬사가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로웰이 말한다. 아직 조선의 모자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고.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자는 조선 사람들의 차림새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고 예를 갖추기 위한 도구인 동시에 추위와 비를 막아주는 훌륭한 실용품이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움과 기능을 겸비한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로웰이, 뒤크로와 키스가, 그리고 길모어와 그 밖의 많은 이방인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조선의 모자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 한 땀 한 땀 꿰매어 정성스레 만든 아이의 조바위와 복건, 한겨울 추위 속에서 따스하게 조선 사람들을 지켜주었던 남바위와 풍차, 그 위에 자수로 또 금박으로 선명하게 아로새긴 갖가지 글자 무늬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색색의 배열까지 이제 그들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찾아내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Chosӧ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은 1883년 발간된 책으로, 미국의 퍼시벌 로웰이 한국을 방문하고 경험했던 다양한 분야(지리, 계절, 도시풍경, 정치·건축, 복식문화, 종교, 행정조직 등)의 경험담을 풀어놓은 역사 기행서이다.

『Pauvre et Douce Coree』은 1904년 초판이 발행된 책으로, 프랑스의 여행가 조르주 뒤크로의 조선 여행기이다.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자료와 조선의 문화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라가 처한 슬픔을 넘어선 조선의 독특한 문화와 깊은 전통의 흔적을 사진과 함께 담고 있다.

『Old Korea』는 1945년 스코틀랜드 화가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키스가 쓴 책으로, 한국을 서방세계에 널리 알린 우리나라 여행 탐방기이다. 그림사진 및 단색으로 된 그림채색 목록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일제 강점기 한국문화의 생활모습과 사회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글_ 조희진 | 국립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강사
한국인의 의식주, 인류학, 사회학, 동양복식사 등 민속과 관련된 컨텐츠를 중심으로 강의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와 고려대학교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수원박물관 교육강사를 지냈고 현재 국립안동대학교와 국립인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사물로 보는 조선』2015, 『조선시대 옷장을 열다』2014, 『선이 아름다운 자연의 옷』2010,『갓 쓰고 도포 입고 에헴』2010 등이 있다.
| 전시 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자와 신발 특별전> – PDF
| 유물자료집 <한민족역사문화도감: 의생활> – PDF

4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출처까지 세밀하게 밝혀주셔서 관련자료를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름만 듣고 어떻게 생겼더라…하는 순간.나타나는 사진.자료 역시 궁금증을 바로.해소할.수.있어.좋았습니다. 관련 그림이 있었다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남습니ㅏ만 첨부된 pdf 파일에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 좋은자료 잘 보고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pdf파일 정말 좋으네요 감사합니다. 공유해서 더 좋습니다.~~^^

  3. 기사 잘 읽었습니다.
    연전에 열렸던 ‘머리에서 발 끝까지’ 특별전을 다시 보고 싶군요.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웹진 제목에 ‘조선의 패피는 모자’라는 제목?
    얼핏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공공기관의 소식지인만큼 용어 사용에 조금 더 세심하셨으면 합니다.
    ‘조선 시대 패션의 완성, 모자’
    누구나 바로 이해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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