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사용설명서

전시 도록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

아버지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에 경상남도 거창, 시골읍내에서 태어나셨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자유당 독재와 새마을 운동을 체험하셨고, 당연히 춥고 배고픔을 경험하셨다. 자식들과 함께하던 시간이면 아버지는 늘 그 춥고 배고픈 시절의 추억을 들려 주셨다. 아버지가 들려 주신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태평양전쟁 기간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면서 국민학교에서는 색종이를 10장씩 나눠주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색종이를 한 장씩 뺏게 했다. 일정한 양의 색종이를 모아 선생님께 갖다 드리면 선생님께서는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크레용을 상으로 주셨다. 물론 한국어를 함부로 쓰다 카드를 다 빼앗긴 학생에게는 호된 꾸지람과 체벌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또 언젠가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돌아와 풀을 먹이러 소를 몰고 뒷산으로 갔다가 풀밭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그사이 소를 잃어버리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 밤늦도록소를 찾아 헤매고 다녔는데, 그 바람에 소를 몰고 가출한 것으로 할아버지께 오해를 샀다는 일화도 있었다.

 

사십 대 중반에 이른 이제 와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국민학교를 다니시던 아버지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친구의 색종이를 뺏어 크레용을 상으로 받은 학생이었는지, 카드를 모두 빼앗기고 선생님께 혼쭐이 난 학생이었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눈물을 훌쩍이며 산으로 들로 헤매셨을 어린 시절 아버지가 ‘조금’ 애틋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추억을 매일같이 들어야 했던 어린 시절, 솔직히 나는 아버지의 추억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달콤한 ‘쫀득이’, ‘아폴로’, ‘달고나’믿기 어렵겠지만 부산에서는 이를 ‘똥과자’라고 했다. 같은 것이 최고의 군것질거리였던 70년대 국민학생이었던 내게 “너 만한 나이에 아버지는 군것질 삼아 칡뿌리를 씹었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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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개봉한 <똘이장군>. 당시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냉전 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이야기의 기본 바탕이었다.
아버지의 추억 속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축복받은 시절’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난 철없는 소년이었다. 아버지의 추억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자란 나는 경제 개발이 시작된 ‘1970년대 남한’에서 태어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사실 ‘남한’에서 태어난 고마움은 아버지의 영향보다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나보다 8살 많은 고등학생 외삼촌의 인솔 하에 삼형제막내인 동생은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가 42번 버스를 타고 부산 시민회관에 가서 본 김청기 감독의 ‘기념비적’ 만화영화 <간첩 잡는 똘이장군>의 영향이 더 컸다.

 

똘이장군이 날아올라 사악한 김일성의 얼굴을 이단옆차기로 강타하면 가면이 벗겨지면서 그의 실체인 흉측한 돼지얼굴이 드러난다. 그때 시민회관을 가득 메운 어린이들의 우레 같은 환호와 박수 소리는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아, 저 ‘혹부리 돼지’ 밑에서 강냉이죽도 못 얻어먹고 신음하는 불쌍한 북한 어린이들!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되던 해에 우리 집은 광안리 부근 아파트로 이사했다. 지금 그곳은 재개발돼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부산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대단지 아파트였다. 5층짜리 아파트로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어색해서 한동안 변비를 앓았고, 4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집에서 나오면 들어가기가 싫었고,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싫었다.

 

아직 한국에서 칼라TV 방송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우리 집에는 미제 RCA 15인치 칼라TV가 있었다. 부산에서는 위성안테나를 달면 일본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는데, <우주소년 아톰>, <이겨라 승리호> 같은 일본 만화영화를 칼라로 본다는 것은 감동을 넘어 감격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던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의 ‘시혜’로 한국 방송을 칼라로 시청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우리 집에는 그밖에도 냉장고, 세탁기, 스테레오 카세트 심지어 전화기까지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전화 회선이 부족해 전화를 신청하면 설치되기까지 몇 년씩 기다리기 일쑤였는데, 전화번호 명의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는 소위 ‘백색전화기’는 대기업 사원 월급이 몇 만 원에 불과하던 시절, 지역에 따라 수백만 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축복받은 시절’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나 ‘1970년대 남한’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던 내 어린 시절 추억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국민학교 고학년 이후 이사를 한 번 갈 때마다 현관문이 거실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지만, 고달픈 도시 빈민 생활에 허우적거리면서도 ‘1970년대 남한’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가 축복받은 세대라는 근거 없는 믿음만은 잃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처럼 보릿고개를 경험한 것도 아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놓고 숙제를 해야 하는 형편도 아니었으며,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어야 할 만큼 물자가 부족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의안방

1970년대의 안방_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 전시장면

 

1970년대의부엌

1970년대의 부엌_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 전시장면

 

아버지의 추억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축복받은 시절’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난 철없는 소년이었던 나는 이제 어린 내게 추억을 들려주시던 그때 아버지만큼 나이도 먹었고, 내 추억 속에서 ‘진실로’ ‘축복받은 시절’ ‘풍족한 집안’에서 철없는 소녀로 자라나는 내 어린 딸을 본다. 아버지가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딸에게 ‘아빠의 추억’을 들려주면, 딸 역시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30여 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딸에게 ‘아빠의 추억’은 어쩌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따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빠 어릴 적에는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아이패드도 없었단다. 한국에서 칼라TV가 방송된 것도 아빠가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5학년 때였지.” “아빠 어릴 적에는 화이트소스 스파게티도 없고, 피자도 없고, 캘리포니아롤 같은 것도 없고, 심지어 월남쌈이나 베트남 쌀국수 같은 것도 없었단다. 외식이라 해봐야 짜장면에 탕수육, 돈가스 정도였지. 뷔페란 곳에 가본 것도 한참 크고 난 후였고.” “아빠는 대학 시험 치러 처음 서울에 가보았고, 설악산에도 대학 들어간 이후에야 가보았어. 외국에 처음 나가본 것도 서른이 넘어서였고.”

 

도대체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아들딸 중 어느 누가 ‘이까짓’ ‘아빠의 추억’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철없고 한심해 보일 때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말이야…”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막 튀어나오려 한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말은 마치 데자뷔처럼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하다. 6‧25전쟁 통에, 4‧19혁명 와중에 대학을 다니셨던 우리 은사님들이 늘 하시던,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매번 시험에 들게 했던 말씀이다. 딸이든 학생이든 그 누구든 웬만해서는 내 추억 따위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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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내게는 한없이 소중하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그 추억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추억을 사용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추억 사용설명서는 이런 것이다.
첫째, 추억을 남용하지 마라. 소중한 물건을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꺼내 보여주지 않듯, 소중한 추억이라면 특별한 사람, 특별한 때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꺼내 들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 특히 그 추억을 공유하기가 쉽지 않은 아랫사람에게는….
둘째, 추억을 말하더라도 가급적 한 가지만, 짧게 말하라. 윗사람의 지루한 추억담이 시작되는 순간, 아랫사람은 추억을 말해 달라고 물은 자신의 방정맞은 입을 원망하게 마련이다.
셋째, 당신의 추억을 말하기 전에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추억담이나 조례 시간 교장선생님 훈화 같은 것들을 한번 떠올려 보라. 당신의 추억담이 아랫사람에게는 그렇게 들린다.
넷째, 적어도 10년 안에는 같은 사람에게 한 번 들려준 추억을 두 번 다시 말하지 마라. 상대편이 웃으며 장단을 맞춰준다고 속으로도 웃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당신의 추억 속에서 젊은 세대가 한심해 보인다면, 젊은 세대는 현재의 당신이 한심해 보인다. 젊은 세대를 말로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먼저 당신의 부모님 세대를 말로 한번 설득해 보라.
결국 추억 사용설명서의 결론은 ‘당신의 추억이 누군가에게 기억되도록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는 ‘당신의 추억’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한 추억’이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의 거리 _국립민속박물관 내 야외전시장

 

추억의 거리 사진관 전시장면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한 주말 오후, 가끔은 아빠 엄마의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 같은 도록을 펼쳐 보거나, 가족의 추억이 서려 있는 동네와 골목, 교정을 산책하며 ‘어색할지언정’ 부모자식간의 대화를 나눠보자. 자녀들은 아빠 엄마의 추억을 이해하기 어렵고, 아빠 엄마는 자녀들의 문화를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세대차이만 확인한 대화일지라도 가족들이 함께한 그 순간이 서로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_ 전봉관 |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근대 조선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뿌리를 찾고 그것을 해결할 지혜를 얻고자 한다. 근대 조선의 다양한 사건을 매개로 현대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비판하는 독특한 형식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 『황금광시대』2005, 『경성기담』2006, 『럭키경성』2007, 『경성 자살 클럽』2008, 『경성 고민 상담소』2014 등 다수의 저서와 「조선일보」, 『신동아』 등에 칼럼을 연재했다.

 

필자는 전시 도록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를 살펴보고, 자신의 추억담을 함께 이야기 했다. 지난 1999년 9월 15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 - 20세기 문명의 회고의 전망>을 주제로 기획전이 개최되었다. 전시 도록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는 아래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전시 도록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 –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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